“나는 탄광 안 무너지게 하는 목수였어”

[2019년 8월 9일 / 제231호] <2> 백수를 앞둔 강제징용 피해자 유사옥 할아버지 박준영 기자l승인2019.08.09l수정2019.08.09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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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에 끌려갔던 영암 사람들
지난해 우리 대법원에서는 강제징용에 따른 피해자에게 전범기업이 배상해야 한다는 내용의 판결이 잇따랐다. 대법원 판결 이후 국내에서는 일본제철, 후지코시, 미쓰비시 같은 전범기업의 국내 재산을 압류하기 위한 법적절차가 진행 중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이 대(對)한국 수출규제를 통해 경제보복을 자행하며 국가간 갈등으로 확대했고, 우리 국민들과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며 분노하고 있다.

 

만 19세에 이내구라이시 광업소에서 3년간 강제징용
70여 년의 세월 속에 기억마저 흐릿…“경제보복 분통” 

 “스물 두세 살 땐가 일본에 갔어. 영암에서 한 100명 정도 같이 같제. 6년 정도 일하다가 해방되고 다시 돌아왔어. 나는 목수 일을 했는디 뭐 일도 하고 돈도 벌고 했응께 좋고 말고가 어디 있겄는가”
할아버지는 잘 들리지 않았는지 매 질문마다 한참씩 고민하다 짧지만 또랑또랑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어쩌면 아주 오래된 기억을 찾는데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는 내내 가슴에 느껴오는 감정은 다르기만 했다. 이 할아버지는 분명 당시의 기억을 아픔으로 남기고 싶지 않으신지 계속해서 미소를 보이려고만 애썼고, 탄광이 무너져 끌려갔던 사람들이 다칠 위험을 막는 목수로 일했던 부분을 말하면서는 ‘현실에서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했다’는 자부심을 표현하고 있었다.
올해 우리 나이로 97세인 유사옥 할아버지를 찾아 금정면 안노리를 찾았다. 
유사옥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 당사자이다. 현재 확인된 바로는 영암 지역에 생존해 계신 거의 유일한 강제동원 피해자다. 
연세 탓인지 불편해진 청력을 제외하고는 생활에 불편이 없을 정도로 건강하신 모습이었다. 다만 2006년 정부의 조사에 의해 피해사실이 인정되었던 기록과 유사옥 할아버지의 기억 속 답변은 조금 달랐는데, 할아버지의 선한 마음이 작용된 이유일 것으로 보여졌다.
2006년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 심의 자료’에 따르면, 1923년생인 유사옥 할아버지는 만 19세였던 1942년 10월경 강제징용되어 일본의 홋카이도(北海道) 후루비라(古平) 정 소재 이내구라이시(稲倉石) 광업소로 끌려가 3년간 노무자 생활을 강요당하다 귀환했다. 탄광에서 일하게 된 유사옥 할아버지는 목수 일을 했다. 나무 등으로 탄광이 무너지지 않게 지지대를 세워 지탱하는 작업 등을 하는 목수 역할이었다. 아직 기반이 탄탄하지 못한 탄광 안에서 지지대를 설치하는 일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
당시 유사옥 할아버지가 끌려갔던 홋카이도(北海道)에는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매일같이 혹독한 노동과 폭언, 폭행, 통제를 받으며 노예보다 못한 삶을 살아야 했던 아픔이 서린 곳이다. 대부분 탄광에서 일했으며, 군수공장과 항만, 비행장, 도로, 댐 건설 등 군사기지 건설현장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기도 했다. 
해방 후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와 5남 2녀를 낳고 평범하게 농사꾼의 삶을 살아온 것이 유사옥 할아버지가 기억하는 지난 70여년 간의 기억이다.
이러한 사실이 증언 등을 통해 확인됐고, 지난 2006년 노무현 정부로부터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 제17조에 의거 일제강점 하 강제동원에 의한 피해사실로 인정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후 약간의 위로금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해당 전범기업이 현재 존재하지 않고 구체적인 자료를 확보하지 못했고, 지난 4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광주전남지부’와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이 준비했던 ‘일제 노무동원 피해 손해배상 소송’ 1차 소송인단에 참여가 되지는 못했다.
장남인 류복렬 씨는 “아버지에게 있어 강제징용은 잊고 싶은 기억일 수 있다”며 “제가 아버지를 대신해 일제 노무동원 피해 손해배상 소송인단에 참여해 기억을 되찾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근무했던 이내구라이시 광업소가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아 아쉽게 선정돼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아들 류씨의 말처럼 백수가 가까워진 유사옥 할아버지에게 당시의 위험하고 고통스러웠을 것 같은 기억들은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당시의 기억에 대해 유사옥 할아버지는 “월급을 22원 정도를 받았는디 먹고 살만 했어”라고 말하기도 했다.
당시 일제강점기 직업별 임금을 살펴보면, 목수(木手)와 석수(石手), 우마차 인부(牛馬車 人夫) 등과 같은 노동자의 월평균 임금은 조선인 11원, 일본인 22원이었다. 당시 조선인이었던 유사옥 할아버지가 일본인에 준하는 월급을 받았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은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에 대해 아들 류씨는 “제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있었던 일이라 지금 하신 말씀이 맞다 혹은 틀리다고 말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며 “2006년 강제동원 피해 심의에서 아버지의 피해사실이 입증된 것을 보면 100세를 바라보시는 지금의 기억이 정확하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강제징용에 따른 대법원 판결에서 비롯된 일본의 경제보복에 대해 아들 류씨는 “일본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옛날처럼 일본 편리만 봐주지 말고 이제 우리나라도 맞서는 것이 필요하다. 이번 정부의 대처에 백번 지지한다”고 말했다.
 

박준영 기자  news@woori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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