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조선의 건국 세력은 사(士), 즉 선비집단이었다. 사는 정치적 지배계급으로서의 문무관료, 즉 관직의 여부보다 독서인으로서의 자질과 소양이 더 중시되었다. 성리학을 지향한 조선의 사는 문치주의에 입각한 정책을 펼쳤는데, 과거제도는 바로 이 문치주의가 발현된 것 중에서 가장 큰 의미를 갖는 제도였다.
연암 박지원은 ‘천자 역시 사’라고 규정했다. 그는 천자는 작위를 가리킬 뿐 신원 자체는 사라고 본 것이다. 천자를 사의 범주에 포함시킨 것은 매우 독창적인 발상이지만, 그만큼 조선 사회에서 사의 존재가 존중되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조선의 사와 일본의 사는 전혀 다른 개념이었다. 일본의 사는 사무라이 즉 무사계급을 뜻한다. 조선과 달리 봉건제였던 일본에서는 핵심 지배층으로서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천황과 실질적 집권자인 바쿠후의 쇼군, 바쿠후의 통제를 받는 다이묘 등으로 계급이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 쇼군과 다이묘들을 보좌하는 역을 담당한 것이 바로 사무라이였다.
이런 봉건적 권력 구조에서는 문치주의와 과거제의 시행이 불필요했다. 오랫동안 봉건제가 실시된 유럽도 마찬가지였다. 계몽시대의 유럽인들은 중국의 과거제도를 접하게 되자 높은 관심을 보였다. 유럽에서 과거제도를 처음 도입한 것은 영국이었다. 그들은 식민지 인도의 공무원을 뽑을 때 처음으로 시험제도를 적용했다. 결과 시험제도는 근대국가의 필수 요소인 ‘전문화된 관료층’을 만들어내는 유력한 제도로 자리 잡게 되었다.
과거에 합격한 조선의 사는 왕의 대리인으로서 한 지역을 다스렸지만 일본의 사는 다이묘에게 고용되어 그를 보필하는 역에 그쳤다. 사무라이는 자신이 소속된 영지의 주군을 섬기는 무사였기에 신분이 세습되었지만, 시험을 치러야 관직을 얻을 수 있는 조선의 사는 신분 세습이 확고하게 유지되기가 어려웠다.
과거제도는 사가 출세하는 최고의 등용문으로서, 1차 즉 초시에서는 전국 각도별로 할당된 인원을 선발했는데, 수천 명의 응시생 중에서 정원의 7배인 240명이 선발되었다. 2차 시험 복시는 서울의 예조에서 치렀는데, 이때 과거 보러 서울에 가는 것을 ‘관광(觀光)’이라고 했다. 1차와 2차, 즉 초시와 복시가 바로 생원, 진사시였다.
초시 합격자에게는 성균관 입학 자격이 부여되었다. 성균관 수학은 대단히 빡세서 수업 출석일수가 연 300일이 되지 못하면 복시 응시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또한 월 10회 이상의 시험을 치렀고 여기에서 낙제점을 받으면 역시 복시에 응시할 수 없었다.
2차 즉 복시에서는 1차 합격자 240명 중 33명을 선발했다. 그리고 최종시험인 전시는 선발 시험이 아니라 복시 합격자 33명의 순위를 결정짓는 시험이었다. 이 순위에 따라 품계가 정해졌는데 갑과 3인, 을과 7인, 병과 23명의 등급을 정하여 등급에 따라 최고 6품에서 최하 9품의 품계를 주었다. 합격자의 연령은 최연소 15세부터 최고령 85세까지였다.
과거제도를 본격적으로 실시한 나라는 중국과 조선과 베트남 등이었는데, 여기서 인상적인 것은 세 나라 공히 제국주의 침략 시기 무력 저항을 이끈 인물 중에 과거 합격자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반면 무력 저항보다는 ‘개화’를 내세우며 계몽, 자강 등을 주장한 것은 대부분 서양 유학파거나 그들을 선망한 사람들이었다.
과거는 평민들에게도 개방하여 신분 상승의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진보적이고 우수한 제도였다. 조선시대 평민 과거 급제자의 비율은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높다.
15~16세기에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성관(姓貫)은 모두 750개 정도이며, 조상 가운데 벼슬아치가 전혀 없거나, 내외 4대조 가운데 벼슬아치가 없는 급제자, 또는 서얼 출신 급제자가 전체 급제자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태조~정종 대 40%, 태종 대 50%, 세종~세조 대 30~34%, 예종~성종 대 22%를 보이다가 16세기에 이르러 17~20% 대를 보이고 있다.(한영우, <다시 찾는 우리 역사> 288쪽)
여기서 갈수록 비율이 줄어든 것은 급제자가 확산 누적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통계를 하나 더 보기로 한다.
과거는 매우 어렵고 오랜 기간 공부를 해야 했지만 의외로 평민층의 합격 비율이 높았다. 순조 시기에는 54%, 헌종 시기에는 51%, 고종 시기에는 60%가 평민이었다. 가장 낮았던 때는 연산군 시절의 30%였다.(박문국 저, <조선의 왕 이야기> 191쪽)
이런 통계는 양반만이 과거를 치르고 벼슬을 세습했다는 통념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게 해준다. 현대 대한민국의 고시 합격자나 로스쿨 출신 중에서 서민의 비율은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조선시대에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달리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개천에서 용 같은 것은 나지 않는다.
[부언] 조선시대를 폄하하는 사람들은 조선의 과거시험에 부정이 엄청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것 역시 식민사관에 기인한 것이다. 어느 나라 시험이든지 일부의 부정은 있게 마련이다. 더구나 과거제도가 500년 이상이나 지속된 조선시대에 어찌 시험 부정의 사례가 없었겠는가? 조선 말기 매천 황현 선생은 야인 신분으로 과거에 세 번 응시하여 세 번 다 급제했다. 반면에 같은 시기 이승만은 다섯 번 응시하여 다섯 번 모두 낙방을 기록했다. 이승만 박사? 어느 면에서 참 코믹한 호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