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무오사화(1498년, 연산군 4년)가 국왕과 대신이 합작하여 청요직에게 일대 경고를 내린 사건이라면, 6년 후인 1504년(연산군 10년)에 발발한 갑자사화는 국왕이 대신과 청요직을 함께 숙청한 사건이었다. 이것은 이 두 사화의 어간인 6년 동안 조선의 정치지형에 의미심장한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무오사화로 인해 청요직의 힘이 위축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잠시뿐, 그들 특유의 간쟁과 탄핵 본능(?)은 불사조처럼 다시 살아났다. 무오사화 불과 1년 후인 연산 5년에 일어난 한 사건을 통해 확인해 보자
하루는 사헌부 이속들이 우의정 성준의 손녀 행렬을 막고 검문을 벌인 일이 벌어졌다. 이 검문에서 당시 금지하고 있던 육류가 발견되자, 이속들은 우의정 손녀의 수행원을 옥에 가두었다. 경위야 어쨌든 일개 사헌부의 이속이 우의정 손녀의 짐수레를 불심검문하고 그 종을 하옥시킨 것은 범상치 않은 일인 동시에 당시 사헌부의 위세를 실감케 하는 일이었다.
이에 우의정 성준(成俊)이 아뢰기를,
"신의 손녀가 새로 시가에 뵈이러 갔다가 그대로 유숙하게 되어 신이 종을 시켜 침구를 지워 그 집으로 보냈는데, 광통교(廣通橋)까지 갔을 때에 5∼6명이 전금리(典禁吏)라 하면서, 종 등을 붙잡고 진 물건을 보려 하므로 종이, 부녀자의 침구이므로 내어 보이려 하지 않으니, 이속이 주먹으로 구타하여 서로 싸웠습니다. 신이 물어서 그것이 헌부(憲府)의 이속이었음을 알고 이튿날 아침에 그 사유를 써서 헌부에 보내었는데, 이속들이 막아서 들여보내지 않고 먼저 고발하되, 도리어 ‘신의 종이 쇠고기 및 가죽을 꾸려가지고 가던 것이다.’고 무고하여 그만 신의 서노(書奴)를 잡아 가두었습니다.
신이 비록 무상(無狀)하오나 정승 반열[臺府]에 참여하였는데, 헌부에서 감히 이럴 수 있습니까. 이것은 신을 가두는 것이옵니다. 헌부에서 신을 평인으로 대우하더라도 이미 글로 고발하였은즉, 서리(書吏)도 함께 가두어야 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역시 다른 관사로 이송하여야 할 것인데, 신의 종만을 가두니, 신이 정말 부끄럽습니다. 피혐(避嫌)하기를 청하옵니다."
- 1499년, 연산 5년 10월 29일 기사
연산은 성준의 항의가 일리 있다고 여겨 성준을 오히려 좌의정으로 승진시켰다. 여전히 국왕과 대신들은 젊은 청요직들의 간쟁, 탄핵 행위를 무도한 능상(윗사람을 업신여김)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국왕 - 대신’ 연대가 붕괴되는데, 그 원인 제공자는 다름 아닌 국왕이었다.
그동안 국왕과 같은 관점에서 젊은 청요직들의 행위를 능상풍조로 보아왔던 대신들은 연산의 왕권 행사가 정상 궤도를 일탈하게 되자 태도를 바꾸기 시작한다. 결과 대신들 역시 연산군의 행태를 비판하는 간쟁에 동조하게 됨으로써 국왕과의 관계는 멀어진 반면 청요직들과 관계가 가까워지는 변화가 일어났다.
연산 5년 좌의정 한치형을 비롯한 의정부의 주요 대신들은 10개 항목을 열거하며 연산군더러 사치를 줄여야 한다고 간언했다. 이후에도 왕을 상대로 한 대신들의 간언 상소가 적지 않게 나타났다. 그들은 연산군이 태도를 바꾸지 않자 다시 ‘시폐 10조’라는 제목의 신랄한 상소를 올렸다.
이와 더불어 청요직 중에서 가장 높은 위상에 있던 홍문관의 상소는 서릿발 같았다. “전하는 재변을 만난 일이 많지만 반성하는 실상은 거의 없다”고 시작하는 홍문관의 상소에서는,
“몇 년 사이에 심하게 흉년이 든 것도 아닌데 먹을 것이 모자라 바가지를 들고 빌어먹는 백성이 길에 널렸고 도적이 봉기해 곳곳에서 약탈하니, 재물이 아래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국가 재정이 부족해 군자를 빌어 충당하며 지방에서 끌어와 부족한 분량을 채우니 재물이 위에 있지 않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위에도 없고 아래에도 없다면 지금 재물은 과연 어디로 들어간 것입니까” (연산 8년 4.20, 김범 저 <사화와 반정의 시대>에서 재인용)
대신과 청요직들의 연합 공세에 연산이 보인 처음의 반응은 당혹감이었다. 그는 간언하러 온 신하들에게 “술이나 마시고 가라.”고 하거나, “내가 부덕해서 실행하지 못한다”는 식의 비열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지만 차츰 분노가 수반된 부정적 감정의 표출로 나타났다.
“대간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정승이 말하고, 정승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육조가 말한다. 아랫사람이 자신의 뜻만 이루려고 노력하니 그 폐단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요즘 위에서 하는 일이라고 하면 기어이 이기려고 해서 쟁론이 끝이 없다. 대간이 사체를 헤아리지 않고 말하는데 대신도 따라서 말하니 결코 들어줄 수가 없다.”
이처럼 중앙정치의 지형은 대신과 청요직이 갈수록 가까워지고 국왕이 고립되는 구도로 바뀌어갔다. 대신들이 청요직을 두둔하는 태도는 갑자사화 1년 전인 연산 9년 들어 더욱 강화되었다.
그 해 봄 영의정 성준, 좌의정 이극균, 우의정 유순, 파평부원군 윤필상 등 주요 대신들은 왕이 열병과 사냥을 중지해야 한다는 삼사의 간언에 지지를 표시했다. 특히 좌의정 이극균은 연산이 “국왕의 자유로운 행동을 막는 대간은 국문하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물었을 때, “대간은 전하께서 너그럽게 용서하실 것을 믿고 말씀 드린 것”이라고 일면 국왕을 ‘가지고 노는 듯한’ 어조로 대응했다.
이런 변화는 군주로서 역량이 부족한 연산군으로 하여금 더욱 소외감과 복수심을 키우게 하는 결과를 빚었다. 연산은 자기의 소외감과 복수심을 정치적인 문제의식으로 논리화했다. 그는 무오사화가 경고에만 그쳤기 때문에 능상의 폐단이 청요직뿐 아니라 대신에까지 만연했다고 판단했다.
연산은 “요즘 대간이 일을 말하면 홍문관과 승정원은 물론 의정부와 육조가 한편이 되어 다시 계청하는 등 아랫사람이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려는 능상의 폐단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연산은 전제왕권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불사해야 한다고 회심하기에 이르렀다. 국왕이, 더불어 국정을 논의해야 할 모든 신하에게 능상의 혐의를 두고 징벌의 대상으로 단정한 결과는 끔찍하고도 무분별한 대규모 피의 숙청으로 나타났으니, 이것이 이른바 ‘갑자사화’였다.
갑자사화는 ‘사화는 훈구와 사림의 대결에서 사림이 (억울하게) 피해를 본 것’이라고 파악한 과거 주류 연구들의 타당성을 잃게 만든다. 우리는 왜 과거의 역사 연구가 사림을 일방적으로 높이고 훈구를 폄하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이런 과거의 연구에 적극적인 왜곡의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고 본다. 먼저 훈구와 사림의 경계를 칼로 무 자르듯이 나눈 것 자체가 사실을 잘못 파악한 것이다. 훈구와 사람(대신과 청요직)은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섞여 있었다. 다시 말해 두 세력의 경계가 분명치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의 주류 서열을 매기자면 1)왕- 2)대신 - 3)청요직 - 4)백성 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식민사관에 의한 조선사 연구는 조선의 주류를 ‘부정적인 가해자’로 만들고, 조선의 비주류는 ‘긍정적인 피해자’로 재단하는 데 급급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조선의 전반적인 역사를 매우 그럴듯하게 깎아내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