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징용 후 진폐증…그것이 강제징용 증거다”

[2019년 10월 11일 / 제239호]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에 끌려갔던 영암 사람들 <9> 박준영 기자l승인2019.10.11l수정2019.10.11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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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했던 가장 故서수원 씨, 일제강제징용 후 평생 진폐증 환자의 삶
병환 중인 부친 대신해 장남 서동열씨 가장의 무게 짊어지며 발버둥

1995년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제2대 군의원을 역임했던 서동열 씨에게는 아픈 과거가 있다. 바로 자신의 부친 故서수원 씨가 일제강제동원의 피해자였고 그로 인해 가족들은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다.
서동열 전 의원이 4살 무렵이었던 1943년 4월 전남 함평에서 농사를 짓던 서씨의 부친은 어느 날 갑자기 일본 순사들에게 붙들려 가족 곁을 떠났다. 당시 마을 이장이 일제노무동원 명부에 서씨의 부친 이름을 올려놨기 때문이었다.
이제 막 재롱을 피우는 아들과 아내를 두고 가는 가장으로서 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제국주의 실현을 꿈꾸던 일본의 ‘국가총동원법’의 시퍼런 칼날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일본 홋카이도의 한 탄광으로 끌려간 서씨의 부친은 강제동원 기간 내내 원치 않게 노역에 시달려야 했고 심한 구타가 매일같이 이어지는 가혹한 날이 이어졌다.
고향이 그리웠고 아내와 유일한 피붙이 아들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눈을 감아야만 그리운 가족을 어렴풋이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2년의 시간이 흐르고 광복과 함께 서씨의 부친은 천신만고 끝에 집으로 돌아왔다.
2년만에 돌아온 가장의 모습은 초췌한 모습이었다. 몸은 망가져 있었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정 기간 기술을 습득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며 회유했던 이장의 말과는 달리 주머니는 텅텅 비어 있었다.
강제징용 이전부터 가난했던 살림이 더욱 어려워졌다. 부친은 강제징용 이후 심한 기침과 가래, 가슴앓이로 경제활동이 어려웠다. 병상에 계신 부친을 대신해 어머니가 가족들을 부양해야 했다. 하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이에 서씨의 가족들은 그나마 가정형편이 나은 외가인 덕진면으로 이사를 하는 것이었다. 외가의 도움을 받아 조금씩 집안사정이 나아질 만하니 6.25전쟁이 터졌다. 어렵사리 마련한 집이 하루 아침에 불에 타 사라졌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이들 가족의 든든한 후원군이었던 외할머니는 인민군에게 학살을 당했다. 또 다시 가난의 구렁텅이로 떨어진 것이다.
장남이었던 서씨는 병상에 누워계신 아버지와 4명의 동생들을 위해 생계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홀로 가족을 챙기시는 어머니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학업을 포기하고 어머니를 도와 식당일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힘들게 버텼다. 그러던 중 서씨는 자신의 부친에게 “왜 아버지는 맨날 아파계시냐”고 물었다. 다른 친구들 아버지처럼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지 못하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투정이었다.
어린 아들의 물음에 아버지는 수년 전 자신이 겪었던 일제강제동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어린 나이였지만 아버지가 들려줬던 이야기는 충격 그 자체 였다. 집단 생활로 장시간 노역에 동원되는가 하면 일일 할당량을 맞추려고 작업을 재촉하는 일본인 ‘십장’에게 매를 맞기 일쑤였다. 또 매월 수당조로 지급되는 월급도 고향에 있는 가족에게 부쳐진다는 말만 전해들을 뿐 손에 쥐어본 적도 없고 실제로 얼마를 받는지도 알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병환은 점점 악화됐다. 입에 풀치도 못하는 상황에서 병원치료는 생각할 수 없었다. 겨우겨우 민간요법으로 치료를 했으나 결국은 30여년간 병상에서만 누워계시다 작고하셨다.
이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된 아들 서씨는 아직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죄송함에 눈시울을 적신다. 당시 병원에서 치료를 제대로만 했더라도 아버지가 조금 더 오래 건강하게 사시지 않았을까하는 생각 때문이다. 또 한 편으로는 왜 하필 자신의 부친을 일제 강제동원시켜 몹쓸 짓을 해 가정을 풍비박산 냈는지 원망스럽기도 하다.
서동열 씨는 “80년의 세월이 흘러 일제강제동원의 역사는 흐려졌고 강제 동원 피해자 당사자들은 대부분 유명을 달리했다”며 “그나마 자손들마저도 백발이 성성해져 이 같은 이야기들을 전할 수 있는 시간도 이제는 많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서씨는 “80여년 전 일제가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선조들에게 했던 만행을 잊으면 안된다”며 “보상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이 지우고 왜곡하려고 하는 역사를 우리의 후손들이 잊지 않고 또 다시 똑같은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다”고 말했다.

박준영 기자  news@woori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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