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봉건국가’가 아니라 ‘민본관료국가’

[2019년 6월 14일 / 제224호] 언제까지 우리 역사를 비하만 하고 살 것인가 영암우리신문l승인2019.06.14l수정2019.06.14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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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요즘 유튜브 <김갑수TV>에서 조선역사를 몇 회 강의해 보니 아직도 조선에 대한 편견과 오해가 완강하다는 것을 느낀다. 댓글 중에는 이런 강의는 처음 들어본다는 내용이 적지 않다. 이런 비지성적인 역사인식을 확정(廓正)하려면 일단 조선이라는 국체에 대해 전반적으로 제대로 아는 일이 긴요하다고 보아 이 글을 올린다.
우리가 알듯이 고려는 918년에 건국, 936년에 후삼국을 통일하여 단일통합국가 만들었다. 고려는 훗날 무신이 장기집권하고 원의 내정간섭까지 받게 되면서 퇴보하지만, 그래도 전반기 200년 동안은 이전 신라 – 발해의 남북조시대에 비해 확실히 진일보한 역사를 구축했다.
고려는 골품제 폐지, 과거제도 시행 등으로 신라보다 합리적인 관료제를 갖추었고, 전시과 실시로 빈부격차를 완화했으며 노비와 천민집단의 해방으로 자유민의 수가 증가했다. 고려는 1392년까지 475년 동안 존속했다.
신생 조선은 고려가 가졌던 귀족제의 잔재를 획기적으로 털어낸다. 조선은 음서제를 축소하여 최고위직과 청요직의 아들에게만 관직 진출의 기회를 허용했는데, 그것도 시험을 쳐서 합격해야만 그나마 아전 급의 낮은 벼슬을 주는 정도였다.
음서제의 축소는 자연히 과거제도를 확대시켜 노비와 중범죄인을 제외하고는 누구나 과거 응시가 가능해졌다. 초기에 고등문관시험인 문과 응시가 금지되었던 서얼은 명종 대 이후 단계적으로 문호를 넓혀가다가 고종 대에 이르러 차별이 완전히 철폐되었다.
조선인의 신분은 자유인인 양인과 비자유인인 노비로 구분되었는데 노비가 양인으로 올라가는 길을 수시로 터주어서 노비 인구가 축소되었고, 노비의 처우가 개선되어 생활이 어려워진 양인이 스스로 노비가 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조선에 대한 오해 가운데 가장 큰 것이 양반에 대한 것이다. 조선의 양반은 고위 공직자를 가리키는 말이지 세습적인 신분제 용어가 아니다. 고위 공직자가 되려면 누구든지 과거를 통과해야 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교육기회도 대폭 확대되었다. 지방 군현마다 관립학교인 향교가 있어서 무료교육을 했고 사립학교인 서원은 향교보다 많았으며 마을마다 서당이 있어서 누구나 초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권력비리를 막는 조선의 시스템은 무서울 정도로 치밀했다. 최고 권력자인 왕과 왕자에게는 경연과 서연으로 교육했으며 그들의 언행을 감시카메라처럼 추적하면서 낱낱이 기록했다. 조선시대 같으면 최고 권력자가 백주에 7시간 동안이나 잠적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탐관오리의 자손에 대한 벼슬길 봉쇄, 오늘날의 공수처와 비슷한 사헌부의 거침없는 공직자 수사 기능, 상피제도(동일 부서 내 친인척 근무 금지), 수령의 자기 고향 부임 금지 등이 실시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공론(公論)과 공선(公選)이 중시되었다. 그래서 수준 높은 언론이 활성화되었고 공개경쟁시험이 확대되었다. 특히 과거 7배수를 뽑는 1차 합격자를 8도 인구 비례로 할당한 점은 대단히 선진적이다.
토지사유제가 인정되었으나 토지 공개념의 정신이 우선 강조됐고, 특히 정치 주체는 사익 추구를 치욕적으로 여겼다. 과부, 홀아비, 고아, 독거노인 등의 결손가정과 빈민에게는 각종 경제적 지원을 했고, 30세가 되도록 결혼을 못한 처녀에게는 결혼비용을 지급하기도 했다.
우리는 조선 성리학의 놀라운 수준과 성과를 재인식해야 한다. 아울러 당쟁(붕당)이 가진 생산적 기능에 대해서도 알 필요가 있다. 붕당은 오늘날의 정당제 역할을 하면서 독점 권력을 견제하는 순기능이 있었다. 조선은 당쟁이 활성화되었을 때는 문제가 적었지만 당쟁이 사라지고 세도정치의 일당독재가 이루어지면서 국력이 급격히 이완되었다.
위와 같은 것들로만 보아도 우리는 조선사회의 성격을 함부로 봉건사회라고 규정할 수가 없다. 조선보다 뒤늦게 19세기에 들어서야 열린 서구의 근대사회는 자유, 평등, 민주를 실천하는 방법에서 개인과 인민의 저항을 중시한 반면, 조선은 전체 공동체의 도덕성을 중심에 놓았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참고로 <다시 찾는 우리 역사>의 저자 한영우는 조선을 ‘근세관료국가’, 미국인 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농업관료사회’라고 규정하는데, 나는 '민본관료국가'라고 부르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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