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독립운동가인가

[2019년 4월 12일 / 제215호] 임시정부 100주년에 즈음하여 – 이승만은 누구인가 1 영암우리신문l승인2019.04.12l수정2019.04.12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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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최근 도올 김용옥 선생이 KBS에서 이승만을 격렬히 비판하자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그리고 이영훈 전 교수와 이승만 유족 등이 일제히 도올과 KBS를 싸잡아 비난하고 나섰다.
도올은 지난 16일 방송된 KBS ‘도올아인 오방간다’에서 이승만을 미국의 괴뢰로 지칭하고 “국립묘지에서 파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김일성과 이승만은 소련과 미국이 한반도를 분할 통치하기 위해 데려온 인물”이라며 “당연히 파내야 한다. 우리는 이 대통령 밑에서 신음하며 자유당 시절을 겪었고 4·19혁명으로 그를 내쫓았다. 그는 역사에서 이미 파내어진 인물”이라고 말했다.
김일성과 이승만을 동렬에 놓는 도올의 발언 내용은 다소 거칠고 디테일에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논점의 본질이 아니기에 따로 거론하지 않겠다. 일각에서는 지금 시점에서 이승만을 비판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라고 과소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 역시 논점의 본질은 아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계기로 이승만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승만에 대한 이야기를 몇 회에 걸쳐 소개하기로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승만이 훌륭한 독립운동가였다고 알고 있다.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는 이승만에게 독립유공자 최고 순위인 대한민국장을 서훈했다. 대한민국장을 받은 인물은 만 명이 넘는 유공자 중 29명밖에 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안중근과 김좌진·김구가 포함되어 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는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추대했다. 문창범이 주도한 노령정부 역시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추대했다. 그리고 독립운동과는 가장 허술한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 만든 한성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제1서열인 집정관 총재로 추대했다.
당시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대한민국 프레지던트’라는 명함을 만들고 집정관총재 집무실을 개설한다. 그리고 그는 한성임시정부를 정통으로 인정했다. 이 때문에 그는 상해임시정부에 각료로 참여한 안창호에게 항의를 받기도 했다.
일단 우리는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 임시정부들이 독립운동에 별로 기여한 바가 없는 이승만을 왜 국가원수로 추대했는지 궁금해진다. 사실 이것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미스터리에 속하는 일이다.
구한말 과거에 다섯 번 낙방한 이승만은 뒤늦게 선교사들이 세운 배재학당에 들어가 개화파로 돌변한다. 그는 김옥균·박영효 등이 주도한 갑신정변의 조교 그룹이었다. 그는 민비 시해 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하다가 선교사의 도움으로 구출된다. 이후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정부전복죄로 투옥되어 사형선고까지 받았지만 민영환의 주선으로 풀려나 도미한 후 학업에만 열중한다. 그가 프린스턴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은 나라가 완전히 망한 1910년이었다.
이후 그는 기독교청년회(YMCA)와 감리교 세계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는 등 독립운동과 직접 관련되는 일을 한 기록이 없다. KBS 한국사전(傳) 이승만 2부작은, 이승만이 (일본의 조선 침략을 두둔하는 미국인 스티븐스를 저격한) 장인환 의사의 재판에 통역을 맡아 달라는 제안을 거절했다고 방영했다. 장 의사의 방법이 폭력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안중근과 윤봉길의 거사 등에도 거부감을 토로했다.
아무튼 그는 임시정부들에 의해 추대된 대통령이었다는 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송건호·이이화 등 이승만 연구학자들은 대체로 연장자를 우대했다는 점, 미국 명문대학의 박사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 미국이 초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었다는 점 등이 작용했다고 진단한다. 이승만은 프린스턴 총장을 지낸 당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가까운 제자임을 은연 중 과시하고 다녔다고 한다.
이이화가 쓴 <한국사 이야기>에 따르면, 이승만은 김규식이 파견된 파리회의에 자신이 가려고 했다. 그가 파리회의의 한국대표를 자임하고 나서자 대한민국중앙총회장 안창호는 이승만을 믿고 한국 대표 자격을 부여했다. 하지만 윌슨 대통령의 제자라던 이승만은 끝내 파리행 여권도 받지 못했다.
파리회의 참석 기회를 놓친 이승만은 난데없이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 위임통치를 건의한다. 1919년 3월 19일 자 <뉴욕타임스>는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파리회의에 참석하는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청원서를 제출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한국은 당장 독립될 가망이 없고 또 독립된다고 하더라도 자치능력이 없으니 미국이 주관하여 국제연맹으로 하여금 한국을 당분간 통치하게 해달라는 청원을 제출한 것이었다. 이 청원의 제출자는 이승만과 정한경으로 되어 있다. 이승만이 상해임시정부에서 불신임되고 급기야 탄핵까지 이르게 된 것은 바로 이 위임통치론이 빌미가 된 것이었다.
상해임시정부를 외면하던 이승만은 상해임시정부가 정통성을 가지게 되자 대통령 직함을 전제로 상해로 건너가 부임한다.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것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더한 역적이다.(신채호)”
“대통령이 위임통치를 건의하는 바람에 정부 대표로 가 있는 김규식 특사가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위임통치를 요청하려면 뭐 하러 파리까지 왔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니 불필요한 오해를 낳는 위임통치 청원을 철회한다는 성명서를 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이동휘)”
이에 대해 이승만은, ‘대통령을 비난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 위임통치 건은 지나간 일이니 철회할 의사가 없다’는 이상한 논리로 거부했다. 이후 그는 임시정부를 팽개치고 다시 미국으로 떠난다.
임시정부로서도 현장에 근무하지 않는 그를 더 이상 대통령으로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이승만이 임시정부에서 탄핵된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었다. 그런데 수구보수적인 사람들은 이승만이 임시정부 내 공산주의 세력의 비토를 받아 탄핵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후 8·15까지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이랬던 그가 조국이 해방되자 74세의 나이로 귀국하여 미국의 지원을 받아 남한 대통령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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