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이마니시 류는 일본에서 처음 조선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이다. 을사늑약 다음 해인 1906년 가을, 그는 신라의 고도 답사 차 경주에 갔다가 거대한 유적들과 조우한 순간의 감동을 아래와 같이 피력했다.
“경주여, 경주여, 십자군 병사가 예루살렘을 바라본 심정이 바로 지금 내 마음일 것이다. 나의 로마는 눈앞에 있다. 내 심장이 고동을 치기 시작했다.... 전세(前世)를 보는 느낌이다. 나는 우리 신라로 다시 돌아왔다.”(이마니시 류 <신라사 연구>)
이 글에서 우리는 먼저 일본 식민사학계의 거물급인 이마니시가 자기 자신을 유럽의 십자군과 동일시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그는 신라를 ‘나의 로마’라고 표현했다. 지독한 모양주의가 아닐 수 없다. 또한 그는 신라를 자기의 ‘전세(前世)’라고 하면서 아예 ‘우리 신라’라고 표현함으로써 신라에 대한 소유권을 내비쳤다.
무섭지 않은가? 그는 신라의 유적을 감동적으로 칭송하면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식민사학은 너무도 정교하고 교묘하다. 또한 여기에는 지독한 모양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이 얼크러져 있다. 다음을 읽어 보자.
“마음에 아무 염려도 없이 나를 은근하게 맞아준 더럽기 그지없는 예의 한인 여인숙에서 냄새 나는 저녁을 먹었다. 마부에게 술값을 주고 한인 몇 명에게 소고기 통조림을 주었더니 참으로 좋은 일본 양반이라고 하면서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는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아 서로 웃었다. 세상 어디에서도 변하지 않는 사랑의 정을 느꼈다.”
정교하고 교묘하지 않은가? 일본인을 은근하게 맞아주는 여인숙의 여인, 그러나 ‘더럽기 그지없는 한인 여인숙’ 그리고 ‘냄새 나는 식사’, ‘소고기 통조림의 시혜에 감동하는 한인들....’ 그래서 이 식민사학자는 ‘세상 어디에도 변하지 않는 사랑의 정’을 느꼈다면서 위선과 기만의 너스레를 떨고 있는 것이다.
이마니시는 조선인들이야말로 “가르쳐야 할 사람들이고 이끌어가야 할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이런 발상은 좋게 말해서 유럽 산 계몽주의이고 정확히 하자면 유럽인이 아시아인에게 품었던 오리엔탈리즘의 일본식 분장이다.
1916년 이마니시는 인생의 일대 전기를 맞이하는데, 그것은 조선총독부가 기획한 <조선 반도사> 편찬 사업에 참여하게 된 일이었다. 이후 그는 1922년 조선사편찬위원회, 1925년 조선사편수회 등에서 조선 고대사 부문의 핵심 역할을 하게 된다. 이미 그는 영국과 프랑스에 2년 동안 유학한 경험이 있었다.
이마니시는 1926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선사 제1강좌의 교수로 임명되어 조선사를 강의하기 시작했다. 그의 제자 중에는 신석호, 김창균 등의 조선인 학생이 있었다. 신석호는 이 일본인 스승을 회고하기를 “우리나라 고서를 굉장히 많아 사들였고 책 사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라고 했다.
어느 날 이마니시는 서울 인사동에서 안정복이 주석을 단 ‘삼국사기’ 초판 중종본을 발견했다고 한다. 고서점 주인은 20원을 내라고 했다. 당시 20원이면 3개월 하숙비와 맞먹는 금액이었다. 이마니시는 선뜻 50원을 지불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그는 조선사 귀중본들을 엄청나게 많이 사들였다. 대학교수가 이런 돈을 자비로 낼 수 있었을까? 아무튼 그가 수집한 조선의 귀중본들은 현재 일본 교토대학과 덴리(天理)대학에 나뉘어 보관 전시되고 있다.
이마니시 류는 유럽 근대 역사학의 체계로 조선사를 서술했다. 그는 ‘현재 일본에 병합되어 있는 조선’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추인하는 방법을 썼다. 결국 그의 조선사 연구는 조선의 식민지 상태를 확인하는 작업이 되어 버렸다.
“통사의 서술이란 역사적 사건들이 내포하는 모든 가능성을 부정하고 - 즉 현재만을 긍정하며 - 이들을 모두 일관된 하나의 스토리 속에 집어넣은 후 뚜껑을 닫아 버리는 행위와 같은 것이다.”(심희찬, ‘근대 역사학과 식민주의 역사학의 거리’)
식민주의 사학은 모두 유럽 식 근대 역사학이다. 아직도 조선 역사는 조선과는 무관한 유럽식 근대주의 담론에 포획되어 있다. 일본이 물러간 지가 벌써 70년이 넘었다. 자주적인 역사학자라면 유럽식 근대 역사학이 합리적 객관성을 중시한다는 것은 말뿐이고 실제로는 식민 지배에 공헌한다는 이 기구한 역설을 이제는 정면으로 돌파해야 한다.
# 작년 나에게 어느 진보정당의 정치학교를 함께 하자고 제안한 전직 서양철학 교수가 있었다. 그가 정치학교의 커리큘럼 시안을 보내왔는데, 유럽의 근대 역사학을 제1 자리에 배치해 놓은 것을 보았다. 이것은 내가 정치학교에 참여하지 않은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다. 나는 식민사학이 뭔지도 모르고 가르치는 정치학교라면 안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얼마 못 가 정치학교는 문을 닫았다는 소식이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