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먼저 우리는 조선인인가 한국인인가를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지금의 우리는 한국인이다. 하지만 우리의 정신과 육체는 대부분이 조선의 것이다. 21세기 인류를 자처하는 우리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의식과 관습, 사고방식과 행동양식, 심지어 우리의 버릇과 외모까지도 대부분 조선적이다. 요컨대 우리의 정체성은 한국이 아닌 조선에 더 많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 역사의 대부분이 조작된 것이라면 너무나 황망하지 않은가?
14세기 말에 건국한 조선은 고려 때보다 훨씬 더 높은 비율의 사람이 지배층에 편입됨으로써 사회적 활력을 키워놓았다. 중국의 명(明)은 자신을 천하의 중심으로 생각했고 조선은 그 천하의 모범국가로 자부했다. 조선은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문명국가를 지향했으며, 대항해와 르네상스를 통해 근대로 나아가던 서양과 방향은 달랐으나 결코 뒤처지거나 선로를 이탈한 것은 아니었다.
연산과 광해의 폭정으로 위기를 맞은 조선으로 하여금 국가의 수명을 이어가게 한 동력은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으로 무장한 사대부들은 왕조의 철폐 대신 반정을 통해 왕을 바꾸는 선택을 감행했다. 중국에서조차 주자학에 대한 반발로 양명학이 대두되던 시점에 이런 조선의 모습은 매우 독특한 것이었지만 오히려 조선은 성리학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그 효용성의 한계에까지 밀어붙임으로써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의 17세기는 오늘의 미 - 중 교체를 연상시키는 명 - 청 교체와 함께 동서문명의 만남이라는 역동적인 국제적 전환기였다. 그렇기에 17세기야말로 오늘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시기이며 연구와 사색의 대상으로서 ‘가장 각광 받는 시대’가 되었다. 두 번에 걸친 외환을 겪는 동안 조선은 위태롭게 휘청거렸지만 그래도 우리 선조들은 한 세기를 다 바쳐 대동법이라는 최선의 개혁을 이루어냈다.
18세기의 조선은 확연히 다른 존재감을 가지고 역사의 정중앙에 복귀한다. 영조와 정조 왕조는 위풍당당했으며 인민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지배층이 기득권을 내려놓으면서 대동법에 이어 균역법이라는 대개혁에 합의하고 이를 실천하여 15세기 못지않은 ‘또 한 번의 절정’을 꽃 피울 수 있었다. 정조의 즉위년도인 1776년, 13개 주의 독립을 선언한 미국의 형편은 400년 전통에 빛나는 조선왕조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또한 1776년 당시 조선의 수도 한성과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비교해 보면 이 시기의 조선은 프랑스에 비해서도 단연 안정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100년이 지난 뒤 사정은 완전히 달라진다. 프랑스가 조선을 침탈한 것은 1866년, 미국이 조선을 침탈한 것은 1871년이며 이 두 나라가 침탈한 강화도에서 1876년의 조선은 일본에 의해 파국을 맞게 된다.
19세기 조선은 붕당이 사라지고 세도정치의 일당독재가 발호했다. 이와 함께 무려 30회가 넘는 제국주의 열강의 군함 침공기가 이어졌다. 당대의 지사들은 위정척사, 동도서기 등의 방식으로 자주성을 지키면서 민족의 활로를 모색했다. 그러나 개화주의자들은 무분별한 사대주의로 치달았다. 흔히 시대착오적인 ‘쇄국’이라는 오명으로 왜곡되어 알려진 흥선대원군의 자주정책은 오늘날 반드시 재평가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
이 시기 조선은 ‘인민의식의 성장’을 이루었다. 조선의 인민은 서구 이상으로 새로운 시대적 가치들을 각성했고 이에 따른 행동을 실천했다. 홍경래의 봉기, 쌀 항쟁, 농민항쟁을 필두로 전개된 인민의 항쟁들 그리고 그 결정체인 동학항쟁 등의 역사는 조선의 인민사가 세계적인 추세에서 결코 뒤처지지 않았음을 실증한다.
1990년대 ‘조선왕조실록’의 완역 이후 조선사 연구는 상당히 축적되었다. 이제 한 개인이 방대한 조선사 전체를 집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역사 연구가 객관적이고 균형을 이루려면 특정 이데올로기에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조선 역사에 대한 새로운 공부를 통해 조선은 왜 봉건국가가 아니라 중앙관료제국가인가, 조선 지배층의 애민과 소통이 얼마나 지극했나, 조공이란 무엇인가, 성리학의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가, 붕당이란 무엇이었나, 조선의 언론자유는 어느 정도였나, 조선의 사대부들은 얼마나 우수했나, 그리고 조선의 인민들은 얼마나 각성된 인간들이었나, 조선 문명은 얼마나 탁월했나 등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조선을 바로 아는 것은 나를 바로 아는 것이고 나를 바로 알지 못하고서는 결코 자주를 가질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