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선대왕께서 종통의 중요함을 위하여 나에게 효장세자를 이어받도록 명하셨으니 근본을 둘로 하지 않을 것(不貳本)이다. 불령한 무리들이 (사도세자를) 추숭하자는 의논을 한다면 마땅히 형률로써 논죄하고 선왕의 영령께도 고하겠다.”(정조실록, 즉위년 3월 10일, 1776년)
정조가 즉위 첫 날 내린 윤음이다. 정조는 생부 사도세자가 아니라 백부 효장세자(영조의 장남으로 세자 책봉되었으나 10세에 죽음)의 아들로 왕이 된 것이다. 이것은 선왕 영조의 배려에 의한 것이었다. 영조는 왕이 죄인(사도세자)의 아들이어서는 안 된다는 판단에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켜 왕위를 계승토록 하는 조치를 취했다.
여기서 정조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것은 사적 의리에 속한다. 반면 효장세자의 아들인 것은 공적 의리가 된다. 정조는 부임 일성으로 사적 의리와 공적 의리를 엄격히 분변하겠노라고 선언한 것이다. 정조에 의하면 의리란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뿐만 아니라 천리에 부합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조는 사도세자의 복권을 주장하는 남인계 일부에게, 차후에도 공사의 의리를 분변치 못하고 경거망동하면 형률로써 다스리겠다고 엄정히 경고한 것이다.
이것은 사정(私情)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공적 영역에서는 철저히 공의(公義)에 준거하여 왕정을 집행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선왕 영조의 탕평은 세력 균형을 위한 효용적 탕평이었지만 정조의 탕평은 절대 의리를 기준으로 하는 가치적 탕평이었다.
나는 작년에 동아일보 논설위원 김순덕이 “정조는 박근혜와 너무도 똑같다”라고 쓴 조금 이상한 칼럼(2016. 1.4)을 읽은 적이 있다. 이것은 역사적 무지의 소치라는 말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는 칼럼이었다.
또한 정조가 부임 일성으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포함으로써 사도세자를 탄핵한 노론을 벌벌 떨게 했다는 호사가들의 주장도 있다. 이것 역시 한 마디로 해서 코미디 수준의 낭설이다. 정조는 매우 우수한 군주였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동시에 적지 않은 오해와 억측을 받는 군주이기도 하다.
정조는 ‘개혁군주’ 또는 ‘계몽군주’라는 평가가 있다. 정조는 규장각을 개설하여 초계문신(抄啓文臣, 임금이 직접 선발한 문신)을 양성했는데, 여기에는 한미한 집안이나 서얼 출신이 다수 포함되었다. 이에 따라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정약용 등이 등용되었다. 정조는 과학기술은 물론 천주교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 많은 독서를 했다.
정조는 조선의 왕 중에서 가장 실력이 출중해서 많은 신하들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개혁군주’, ‘계몽군주’라는 호칭이 굳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기에 정조가 ‘주자학적 전통을 탈피한 군주’라는 전제가 붙는다면 이건 잘못되었어도 크게 잘못된 것이다. 정조는 조선의 왕 중에서 가장 주자학에 충실한 군주였기 때문이다. 그는 주자와 송시열을 양대 성인으로 우러러보았다.
정조가 주자학적 군주라고 해서 책만 많이 읽은 문사적 인격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정조는 문과 무를 겸비한 인격체였다. 그는 2만 병사의 정예부대 장용영(壯勇營)을 만들고 병사들의 실전훈련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또한 정조의 궁술 실력은 태조 이성계의 신궁 못지않아서 50발을 쏘면 언제나 49발을 적중시켰다. 그러고 나서 하는 말이, “군자는 재능을 뽐내서는 안 된다”였다고 한다. 이것은 일부러 한 발은 맞히지 않았다는 뜻이다.
다만 정조는 영조와 달리 건강관리를 거의 하지 않았다. 식사가 불규칙했고 수면 시간이 짧았다. 거기에다 그는 거의 매일 술을 마셨고 폭음도 마다하지 않았다. 재위 24년 내내 그는 병증을 호소했고 특히 죽기 1년 전부터는 그 증세가 아주 심각해졌다.
지난 2009년 2월, 정조가 노론의 영수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이 발견되었다. 여기에서 정조는 “나는 온몸에 열이 상승하여 등이 뜸을 뜨는 듯 뜨거우며, 눈은 횃불같이 시뻘겋고 숨을 가쁘게 쉰다. 시력이 안 좋고 현기증이 심하여 책상에서 힘을 쓸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이 심하다.”라고 하소연했다. 이것은 죽기 1년 전에 쓴 어찰에 담긴 내용이다.
역사 담론가 이덕일은 정조독살설을 제기한 바 있다. 또한 정조독살설을 다룬 소설로 <<영원한 제국>>이 있다. 100만 부가 팔린 이 책의 지은이는 이대 교수 류철균인데 그는 최근 정유라 성적 조작으로 구속되었다.
이런 센세이셔널한 소재는 대부분 책을 많이 팔기 위한 전략과 관련되어 악용되는 것이다. 동서고금 갑자기 죽거나 일찍 죽은 군주에게 예외 없이 타살설이 제기되는 것은 역사의 불문율이기도 하다. 정조는 48세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