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1778년 연행사 일원으로 청의 수도 연경(북경)을 방문하고 돌아온 박제가는 <<북학의, 北學議>>를 저술했다. ‘북학의’에서 북은 청을 가리킨다. 이 책에서 박제가는 청의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주장을 폈다. 조선 사회에 이른바 ‘북학론’이 등장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선의 학자들은 대체로 반청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북학론을 주장한 이들은 연암 박지원의 문인들에 많았다. 이것은 박지원을 필두로 박제가, 이희경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반면에 이덕무나 유득공은 북학에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이덕무는 박제가가 청을 지나치게 사모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연암 일파를 모두 북학파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문제가 있다. 북학파를 모두 ‘실학파’와 동일시하는 관점이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실학이라는 것이 마치 ‘실체적 학파’로서 특정한 시대에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 아는 오류이다. 실학은 ‘사실’이 아니며 단지 ‘개념’일 따름이다.
실학은 ‘실속 있는 학문’ 또는 ‘실행하는 학문’ 등의 뜻을 가지는 보통명사이지 고유명사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대체로 실학이라는 것을 조선 영, 정조시대 발흥한 학문적 ‘운동’이거나 ‘학파’로 알고 있는데, 실학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으니 실학은 특정한 운동도 될 수 없고 학파도 아닌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실학’이 58회 언급되는데, 이를 시기별로 나열하면 태종(1) 세종(7) 단종(1) 세조(1) 성종(4) 연산군일기(2) 중종(21) 명종(3) 선조(3) 선조수정(4) 인조(1) 현종개수(2) 숙종(1) 숙종보궐정오(1) 영조(1) 정조(5) 등이다. 이 모두가 보통명사로 사용된 ‘개념’이다. 영, 정조 시대라고 해서 유달리 많이 사용되지도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실학의 허구성에 대해서는 나의 다른 글 ‘실학을 과대평가하는 실없는 사람들’에서 논의한 바가 있으므로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는다. 다만 실학은 1930년대 서구식의 ‘근대’ 콤플렉스에 젖은 최남선, 문일평 등의 국학자들이 조작해낸 용어에 불과하다는 점, 그리고 이것은 실학이 기존의 주자학에 반하는 학문으로 왜곡되어 전통적인 주자학을 모두 ‘허학’으로 매도해 버리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만은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도올 김용옥은 <<독기학설>>에서 “실학이라는 개념은 폭파시켜 버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는데, 이 글이 수록된 도올의 논문은 청탁을 받고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끝내 학회지에 수록되지 않았다는 점을 알리고 싶다.
나는 실학 대신 ‘북학’이라는 말은 쓸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북학이라는 것도 기실 거창하거나 유별난 것이 아니다. 북학자들은 모두 ‘의리지학’을 중시하는 성리학자들이었다. ‘북학’이라는 말 자체가 <<맹자>>에서 따온 것이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사람 진량이 주공과 공자의 도를 흠모해 북쪽으로 가서 배우고 싶다고 말한 데에서 연유되었다.
북학론자들은 전통적인 성리학의 범위 내에서 ‘경세’를 중시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수광은 백성들의 의식주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나서 도를 논의하자고 했다. 홍대용은 ‘성리란 나날의 삶에 필요한 일용에 흩어져 있다고’ 했다.
심지어 국왕 정조도 ’이용후생에는 중화와 이적을 가릴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들은 수레의 사용을 주장하면서 ’조선은 길이 좁아 수레를 사용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수레를 사용하지 않아서 길이 좁은 것‘이라고 했다. 지당한 주장들이다.
북학파는 천주교와 분리해서 서양의 과학기술 성과만을 수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도덕, 윤리는 성리학을 통해 함양하고 과학 기술은 서양의 성과를 받아들여 발전시키자고 했다. 특히 박지원은 ‘해양통상론’을 주장했다. 이것은 가까운 중국의 강남이 적당하므로 ‘강남통상론’으로 구체화되었다. 역시 지당한 주장들이다.
당시 청나라는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3대를 거치며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특히 건륭제 대는 청의 최전성기였다. 건륭제는 10번의 정벌에서 모두 성공했다. 청은 몽골족과 중앙아시아 민족까지 지배하는 세계적인 대제국의 위용을 갖추게 되었다. 건륭제는 <<사고전서>>를 출간했는데 이것은 1773년부터 9년 동안 수집, 편찬하고 10년 동안 교열을 거쳐 1792년 8만 권의 방대한 분량으로 출간되었다.
이런 청을 배우자는 것이 북학파들의 주장이었다. 지극히 당연하지 않은가? 북학파는 중국 여행 경험을 통해 세상의 변화를 읽은 진취적인 성리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청을 일방적으로 예찬하지는 않았다. 박지원과 홍대용의 저서들에는 청의 약점과 한계에 대한 예리한 시각과 비판도 함께 들어 있다.
나는 이들이야말로 조선의 전형적인 학자들이었다고 본다. 이들을 ‘반주자학자’로 띄워주는 것, 이것은 역사의 왜곡이자 조선에 대한, 그리고 우리의 전통에 대한 허황된 ‘디스’에 불과하다. 허세, 부화(浮華), 실질 없는 모방, 서구 껍데기들에 대한 동경.... 이런 것들이 오늘의 한국 사회를 좀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