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1663년(현종 4) 홍문관 수찬 김만균이 있었다. 그는 ‘할머니가 병자호란 때 죽었기 때문에 청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행공에 참여할 수 없다’고 사직 상소를 올렸다. 이에 승지 서필원이 ‘공과 사를 가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김만균을 탄핵했다.
서필원은 혹시 ‘부모라면 모를까 할머니까지 적용할 수는 없다’고 하며 ‘개인사를 일일이 용인하면 조정의 기강이 잡히지 않아 공적 업무가 수행되지 않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만균은 이에 불응하여 다시 사직 상소를 올렸다가 왕명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금부에 하옥되었다.
김만균에게도 할 말이 있었다. 할머니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것은 자기 아버지의 유언이었다. 이것을 알게 된 현종은 김만균의 하옥을 풀고 그를 파직하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했다. 이에 대해 S라는 사람이 한 말을 들어 보자.
S : “이번에 듣건대 근일 종신(김만균)이 의리를 내세워 전하에게 간청한 바, 조정이 결국 그를 파직시켰다고 하는데, 신은 삼가 이를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리를 미루어 저들 청나라 사신의 일에 간여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본래 인간의 심정상 당연한 일인데다가, 그 사람이 또 아비의 유지(遺志)를 받들었고 보면, 죄가 없어야 마땅할 듯한데 오히려 죄를 주었습니다.”(현종실록, 1664년)
이 일을 놓고 승지 서필원 측과 S 측 사이에 일대 논전이 벌어진다. 서필원 측은 왕명을 중시하는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입장인 반면, S 측은 왕명이 안 중요한 것은 아니나 인간의 보편 의리가 곧 공이고, 국가의 공 역시 이에 기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지난 번 글에서 우리는 예송논쟁에 대해 살펴보았다. 나는 이 논쟁의 배경에는 ‘왕이 사대부와 같은가, 다른가’라는 주제가 함의되어 있었다고 했다. 만일 왕이 사대부와 같은 존재라면 당연히 임금이건 누구건 동일한 기준이 적용되어, 효종(봉림대군)은 그 집안의 차남이 된다. 왕은 어디까지나 사대부를 대표하는 존재일 뿐 그 이상 특별한 존재는 아닌 것이다. 이것은 조선을 건국한 삼봉 정도전의 인식과 같은 것이며, 조선의 헌법인 『경국대전』의 것과도 일치하는 인식이다.
위에 언급된 S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남인의 영수 윤휴(尹鑴, 1617~1680)는 달랐다. 일찍이 윤휴는, “우리나라에는 10만 정병이 있고 식량도 쉽게 장만할 수 있으므로 열흘이 못 되어 심양을 차지할 수 있고, 심양을 빼앗고 나면 관내(關內)가 진동할 것이니,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염려가 없습니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강경한 북벌론자였다.
나는 당시 세계적 강국이었던 청나라의 수도를 열흘이면 점령할 수 있다는 윤휴의 말이 공허하게 느껴진다. 윤휴는 언제나 왕권우선론자였다. 윤휴 등은 왕권 강화책을 통로로 삼아 자기들의 새로운 권력 기반을 구축하려고 했다.
그들은 국왕과 왕실은 사대부나 일반 백성들과는 다른 예법의 원칙을 따라야 한다는 왕자예부동사서(王者禮不同士庶) 원리를 강조했다. 이에 반해 S 측은 국왕과 왕실도 보편적 예법의 원칙을 따라야 한다는 천하동례(天下同禮)의 원리를 내세웠다. 여러분은 어느 편의 주장에 동의하는가?
윤휴가 『중용』과 『대학』을 중심으로 주자와 다른 해석을 낸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윤휴가 중시한 것은 사회구성원 개개인이 아니라 왕정과 그를 대표하는 군주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그는 존비귀천(尊卑貴賤)으로 서열화된 사회구조를 실현하는 것이 예법이므로, 예법의 실천이 곧 학문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반면 S는 이런 윤휴를 비판적으로 보았다. S는 예법도 군주라고 해서 특별하게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인간 보편적인 원리를 주장했다. S가 과도한 특권으로 왕실의 금고 역할을 하던 내수사의 혁파를 주장한 것도 국왕과 왕실 역시 보편적 원리를 따라야 한다는 사상에서였다.
S는 사내종이 양인과 결혼해 자식을 낳으면 자식은 아버지의 신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양인인 어머니를 따라 양인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노비를 줄이고 양인을 늘려 나가는 정책을 펴야 한다고 했다. 1801년 조선이 획기적으로 공노비 해방 조치를 취한 것은 S의 이런 사상과 연장선상에서 행해진 것이었다.
그런데 요즘 한국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윤휴는 ‘탈주자학의 선구자’로 추앙하는 반면 S를 조선을 망하게 한 주범으로 지목하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가 바로 역사 담론가 이덕일이다. 이덕일은 윤휴를 칭송하고 S를 주자학의 대가라는 이유로 매도한다.
이제 S가 누구인지 이미 짐작이 가리라고 본다. 송시열이다. 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 언급 횟수가 가장 많은(약 2,800회) 인물이며, (이덕일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낮게 평가하는) 정조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이다.
이덕일은 말한다.
“한 사람은 ‘주자의 세상’을 구축하려 했다. 다른 한 사람은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만 안다는 말이냐”고 일갈했다....주희를 절대화해 양반 사대부 계층의 기득권을 굳히려는 쪽과 생각의 자유, 주체적 사회개혁을 꿈꾸는 쪽의 충돌이었다.”(이덕일, 『윤휴와 침묵의 제국』)
허술한 책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쓴 이덕일은, 조선은 ‘주자를 신봉한 송시열 때문에 망했다’고 말한다. 송시열이 죽은 것은 1689년이다. 조선이 망한 것은 이로부터 221년 후인 1910년이다.
221년이면 다른 나라 같으면 한 왕조의 수명쯤 되는 장기간이다. 이덕일의 논리라면, 조선이 1592년에 임진왜란을 맞은 것은, 임진왜란 200년 전인 1392년에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때문이라는 논리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다. 내가 보기에 이덕일은 사이비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