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 희대의 도둑이 잡혔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백정 출신의 임꺽정이라는 자였는데, 조선 정부는 그를 단순한 도적이 아니라 반란군의 수괴로 지목해 처형했다. 임꺽정 무리는 황해도 산간지대에 근거지를 두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관아와 부호를 공격하고, 얻은 재물은 백성에게 나눠 준다고 해서 의적으로까지 불렸다. - (민음 한국사, 조선 02, 102쪽)
성호 이익은 조선조 3대 도적으로 홍길동과 장길산과 임꺽정을 들었다. 이 셋은 모두 실존인물인데, 홍길동은 조선 전기(연산군), 장길산은 조선 후기(숙종), 임꺽정은 조선 중기(명종)에 출현했다. 또한 이 세 사람은 모두 소설로 극화되어 세상에 널리 알려졌는데, 홍길동은 허균, 장길산은 황석영, 임꺽정은 홍명희에 의해서였다.
조선은 개국 150년이 되는 16세기 중반에 이르러 국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조선의 부정적인 면을 말할 때 흔히 거론하는 항목들, 이를테면 성리학의 교조화, 족보·가문에의 집착, 연장자 우선의 위계질서, 여성의 사회적 차별 등이 비정상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무서운 것은 기득권자들의 탐욕이었다. 그리하여 이른바 ‘조선의 때 이른 절정’은 삽시에 시들어가고 있었다.
임꺽정은 경기도 양주에서 소나 돼지를 도살하던 백정이었는데 가축 도살을 담당하는 관리들의 횡포와 수탈에 분격하여 도적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의 무리는 황해도 봉산에 소굴을 두고 평안도, 강원도까지 활동 범위를 넓혀나갔다.
<명종실록>은 임꺽정 무리를 약탈과 살인을 일삼은 잔인한 도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민가를 불사르고 말과 소를 닥치는 대로 약탈했으며 저항하는 사람은 살을 발라내고 사지를 찢어 죽였다. 또한 자기편끼리도 반대자가 나오면 회의 도중에 현장에서 베어 죽이기도 했다.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서도 임꺽정은 ‘정의로운 의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힘과 재물을 얻게 된 임꺽정은 기생집에 출입하면서 기생 셋을 첩으로 삼기도 하는 등 당시 기득권층의 부도덕한 행위를 똑같이 답습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소설 <임꺽정>을 걸작으로 만든 요인이기도 하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우리는 부도덕한 강자에게 저항하는 데 과연 ‘정의로운 저항’이라는 것이 가능한 일일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홍명희는 임꺽정을 계급적으로 각성한 민중의 수괴로 말하고자 했지 정의로운 저항인 따위로 그리지 않음으로써 ‘소박하고 미숙한 작가’가 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임꺽정은 한마디로 해서 ‘시대의 산물’이었다. 이 말은 그의 출현이 다분히 필연적이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것은 조선 조정이 전력을 쏟았음에도 불구하고 도적 하나를 체포하는 데 3년이나 걸렸다는 사실과 임꺽정이 유달리 황해도에서 세를 얻었다는 사실 등으로 미루어 알 수가 있다.
일단 부당한 강자에게 저항하는 것은 공분하는 다수의 지지를 얻는 법이다. 임꺽정은 공분하는 다수의 지지를 얻었기에 3년 동안이나 버틸 수가 있었다. 다음으로 당시 황해도는 왕실의 착취 대상 1호 지역이었다.
황해도는 왕실이 있는 서울에서 가까운 지역이다. 당시 황해도 백성들은 노전(蘆田), 즉 갈대밭으로 인해 유독 심한 수탈을 당하고 있었으며 이것이 ‘임꺽정의 난’으로 가는 도화선이 되었다. 조선시대의 갈대밭은 그 자체로서 경제적인 수익을 낼 수 있는 재화나 다름없었다. 갈대 이삭은 빗자루를 만드는 데 요긴했고, 갈대 줄기로는 발과 삿갓과 삿자리 등을 만들 수 있었다.
갈대밭은 경작지를 빼앗긴 백성들이 최후로 의지하고 있었던 생계수단이었다. 그런데 조선 왕실은 내수사를 시켜서 갈대밭을 왕실 재원 마련 수단으로 확보하고 나섰고 이를 국왕 명종이 대간들의 반대를 물리치면서 적극 지원했던 것이다.
백성의 최후 생계수단마저 자기들의 탐욕을 위해 빼앗는 나라는 망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럼에도 조선은 이후 350년 이상을 더 지탱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면서도 놀라운 일이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당대 지도층 중에 건강한 일부가 여전히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임꺽정 무리를 모두 도둑이라고 진단하지 않았다.
실록은 ‘도둑은 기껏해야 8~9명’이라는 기록을 남겨 놓고 있다. 말 그대로 ‘뭉치면 도둑, 흩어지면 양인’이니 그들을 흩어지게 해야 할 책임이 권력층에게 있다는 논조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명종실록>에서 사관의 변을 읽어 보자.
- 사신은 논한다.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지금 재상들의 탐오가 풍습을 이루어 한이 없어 수령은 백성의 고혈(膏血)을 짜내면서 못하는 짓이 없다. 그런데도 곤궁한 백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도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는 형편이다. 그러므로 너도나도 스스로 죽음의 구덩이에 몸을 던져 요행과 겁탈을 일삼으니, 이 어찌 백성의 본성이겠는가.(명종실록, 14년 3월 27일, 1559년)
- 사신은 논한다. 국가에 선정(善政)이 없고 교화가 밝혀지지 않아 재상들의 횡포와 수령들의 포학이 백성들의 살과 뼈를 깎고 기름과 피를 말려 손발을 둘 곳이 없고 호소할 곳도 없으며 기한(飢寒)이 절박하여 하루도 살기가 어려워 잠시라도 연명(延命)하려고 도적이 되었다면, 도적이 된 원인은 정치를 잘못하였기 때문이요 그들의 죄가 아니다. 어찌 불쌍하지 않은가. 근본을 생각해 보면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 아닌데,...어쩌면 그리 오판(誤判)하는가.(명종실록, 명종 16년 10월 6일, 1561년)
부도덕한 강자에 대한 약자의 저항이 정의로워야 한다는 생각은 소박하고 미숙하기 때문에 비롯되는 것이다. ‘준법투쟁’, ‘평화시위’, ‘비폭력 무저항’, ‘헌법 안의 진보’ 따위가 모두 그런 것들이다. 임꺽정이 보기에 이런 말들은 죄다 ‘익은 밥 먹고 하는 선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심지어 이런 주장을 펴는 사람은 아예 강자의 편일 수도 있다.
* 이것으로 조선역사 에세이 ‘조선 전기 편’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