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구정의 교훈과 봉하마을의 비극

▲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한명회(韓明澮, 1415~1487)는 조선전기 계유정난의 설계자로서, 성공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한명회는 또한 두 딸을 예종과 성종에 들이면서 왕의 장인으로서, 지략으로 당대 권력의 정점에 위치하였다. 그는 만년에 한강변에 압구정을 지었다. 한명회는 과연 말년을 갈매기와 함께 보내려고 했을까?(이근호, <인물한국사> ‘지략으로 권력의 정점에 우뚝 서다’ 중에서)
성종이 왕으로 오른 후 한명회의 위세는 전임 세조나 예종 때보다 더욱 커졌다. 왜냐하면 예종이 죽었을 때 제3서열이었던 성종을 왕으로 만든 이는 정희왕후(세조비, 자성대비)와 한명회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명회는 성종의 장인이기도 했다.
한명회는 1476년(성종 7년) 한강변에 압구정(狎鷗亭)이라는 이름의 정자를 지었다. 이 이름은 명나라 관리 예겸이 지어준 것이다. ‘압구’는 갈매기를 가까이한다는 뜻으로 말년을 세속과 거리를 두고 갈매기를 벗하며 지내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런데 과연 당시 권력의 정점에 있던 한명회에게 진정으로 ‘갈매기를 벗 삼아 여생을 마무리 하겠다’는 의지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압구정이 완성되던 날, 성종이 직접 시를 지어 축하해 준 것은 한명회의 이런 의지를 믿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그렇게 하기를 바란다는 뜻이 담긴 행위였을 터이다.
하지만 한명회가 스스로 지은 정자 압구정은 아이러니하게도 권력을 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권력을 시위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나는 한명회에게는 틀림없이 콤플렉스가 있었다고 본다. 그는 과거를 통하지 않고 쿠데타를 일으켜 신분이 급상승된 인물이다. 계유정난 전 그는 종9품 궁 관리직에 머물러 있었다.
13세에 즉위한 성종은 자성대비의 수렴청정을 기꺼이 받았다. 그러는 사이 그는 철저히 왕업을 수학하여 고도의 성리학적 인격을 함양할 수가 있었다. 반면에 한명회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전임자 세조와 그랬던 것처럼 대궐 내에서 수시로 술자리를 열었다. 성종이 20세가 가까워지자 자성대비는 수렴청정을 그만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여기에 한명회는 강력한 반대를 표시한다.
“수렴청정은 예로부터 전례가 있는 일인데 무엇을 꺼리시는 겁니까? 대비께서 그러신다면 우리나라의 종사와 백성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상께서 즉위한 후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다스려지게 된 것은 모두 대비께서 보호하고 이끌어 주신 능력 때문이오니 권력을 돌려주지 마소서.”
이것은 장차 현군을 꿈꾸고 있던 성종으로서 매우 섭섭하거나 얼마든지 오해할 소지가 큰 언명이었다. 하지만 성종은 당장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명회는 얼마 후 대간들의 탄핵을 받게 되어 당혹감을 느낀 나머지 항의의 뜻으로 사직을 청하게 된다. 이런 일련의 행동들은 한명회가 예전답지 않게 촉이 무뎌져 자만해졌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로부터 6년 후인 1482년, 한명회는 또 한 차례 결정적인 실책을 범하게 된다. 그는 중국 사신 정동이 자신의 압구정을 구경하고 싶다고 하자 바로 응낙한다. 그런데 여름이라서 정자가 더울 것 같으니 차일을 치는데 기왕이면 왕실에서 쓰는 용봉차일(왕권을 상징하는 용과 봉이 수놓인)을 쓰고 싶다고 성종에게 요청한 것이다.
이에 성종은 처음에는 완곡하게 거절 의사를 밝힌다. 성종은 중국 사신을 너무 융숭하게 대접하면 요구가 갈수록 더 심해질 수도 있으니 아예 압구정이 아닌 제천정에서 연회를 열라고 지시했다. 제천정은 압구정과는 달리 왕실에서 지은 공식 정자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한명회는 제천정 연회에 아내의 병환을 이유로 대며 불참하겠다고 말한다. 이런 무례는 대간들에게 격렬한 탄핵을 받게 되어 한명회의 실각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다. 성종은 한명회를 하옥하고 도성 밖으로 쫓아내라는 명명을 내린다. 명령은 나중에 취소되기는 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한명회의 위세가 곤욕스럽게 균열 난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압구정 사건을 통해 한명회의 내면에 있던 두 가지 욕구를 읽을 수가 있다. 그는 압구정을 지어 세속과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자기의 격조나 품격을 높이려 했다. 하지만 그는 압구정으로 오히려 자기 권력을 과시하는 사려 깊지 못한 행동들을 벌였다. 이것은 그가 옛날 같지 않게 권력의 속성을 읽는 데 둔감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노무현이 퇴임 이후 선택한 봉하마을은 한명회의 압구정과는 전혀 다르다. 하지만 나는 두 가지 면에서는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봉하마을을 선택함으로써 세속과 거리를 둔다는 이미지로 자기 삶의 격조나 품격을 높이려는 욕구가 노무현에게는 없지 않았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실제 봉하마을로 간 그는 결과적으로 퇴임 후 갑자기 치솟은 인기를 바탕으로 자기 권력을 시위하는 행동들을 벌였다는 점이다.
그는 열광적으로 봉하마을에 찾아온 관광객들을 즐겨 맞이했고 자기에게 권력을 안겨 준 노사모들 앞에서 다소 비상식적인 연설을 서슴지 않았다.
“노사모는 끝이 없이 갈 것 같다. 여러분들은 자녀 교육을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노란 모자와 티를 입혀 노란 물을 들여 놓으니 이 아이들도 갈 데까지 가지 않겠나? 만일 노란 물이 유전자 DNA에 입력된다면 대를 이어 노란 물이 갈 것이다."
나는 노무현의 이런 일련의 행위가 새로운 권력자들에게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소지가 컸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새로운 권력자 이명박은 한명회 시대의 성종과 달리 성리학적 교양인과는 한참 거리가 먼 위인이었다. 나는 그때 노무현에게 위험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글을 언론에 기고했다.
“수명이 길어진 현대에 그는 아직 왕성하게 활동해야 하는 중년이다. 봉하마을에 안주하며 관광객이나 노사모의 방문이나 받으면서 전직 대통령의 안락함에 취하다가는 그는 영락없이 '피에로'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피에로는 익살꾼이다. 그는 무지하지만 순정의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시대에 대한 비판도 하고 때로는 비극적인 입장에 서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정체는 한낱 어리석은 광대일 따름이다. 우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피에로처럼 되는 것을 결코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 <오마이뉴스> 2008년 6월 8일, ‘노무현 유감, 봉하마을의 피에로가 되려는가’
나는 가끔 페이스북 같은 데에 욕설을 쓰기도 하고 팟캐스트 방송에서 막말을 불사하기도 한다. 사람이 나이를 먹거나 지위가 상승하면 전에 없던 욕구가 하나 더 생기는데, 그것은 옛날보다 고상해져야 한다는 생각, 즉 격조나 품격 같은 것을 찾게 되는 일이다.
사람들은 이런 것을 온당하고 자연스러운 욕구로 여기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단 나는 (나이는 먹었지만) 지위가 상승된 적도 없을 뿐더러, 젊은 시절 격조나 품격 따위와는 무관하게 살아온 내가 갑자기 그런 것을 추구하게 되는 것은 오히려 부당하고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임기 중 보톡스를 맞고 골프를 친 노무현은 원래의 노무현이 아니었다.
아무튼 나는 요즘도 평소대로 욕설도 하고 막말도 불사한다. 이제 와서 내가 새삼스럽게 격조나 품격을 얻으려 하면 나의 삶이 왜곡되거나 일그러지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아닌가? 나는 ‘생긴 대로 산다’는 말을 '격조'나 '품격'보다 더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