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달사현장사업회 사무국장, 영암학회 회장, 소설가 이영현

해자(垓子)란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성(城) 주위에 파 놓은 구덩이를 말한다. 읍성의 필수 요소로, 병법가들은 해자가 없는 성곽은 판자집처럼 쓸모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영암성에 해자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1451년 하삼도(下三道) 도체찰사 정분(鄭苯, 1394년~1454년)의 보고서를 보면 영암성을 완공하였으되 해자는 아직 설치하지 않았다고 하였고, 성곽 조성 이후 조선 말까지 7차례나 영암군지가 발간되었지만 해자를 만들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래서인지 2011년 동무지구 개발사업 관련 문화재 시굴조사 때 전남문화재연구원에서 경찰서 뒤쪽 성벽 기저부에서 약 15미터에서 27미터 정도 거리에 깊이 120센티, 폭 약 6~10미터의 해자 흔적이 있다고 하자, 다들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영암성에는 해자가 있었다. 그것도 인위적으로 땅을 파고 물을 채운 인공 해자가 아니라, 영암성 남문 앞에서 동문 앞으로 흐르는 자연 해자가 있었다. 진주 남강이 진주성의 해자 역할을 하였듯이 영암성 밖에는 이미 하천이 흐르고 있었다.

영암성의 자연 해자를 찾기 위해서는 여지도서 등 각종 지리지 ‘제언(堤堰)’ 조에 등장하는 금교언(金橋堰)과 회현원(會懸堰)을 찾아야 한다. 1897년 군지를 보면 금교언은 둘레가 938척(포백척<1척=46㎝>으로 431m)이며 성의 북쪽에 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1988년 마을유래지에 ‘금교언’은 바로 ‘군더리방죽’이라고 돼 있다. 지금도 많은 노인들이 현 공설운동장 자리가 ‘군더리방죽’이었다고 말한다. 군더리의 ‘군’은 ‘金(금)’의 방언이고, ‘더리’는 ‘다리(橋)’의 방언이므로, ‘金橋(금교)>金다리>금더리>군더리’로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한자 훈자 표기에서 ‘금(金)’은 ‘쇠’가 아니라 ‘새롭다’는 뜻으로 많이 쓰인다. 즉 금교언은 ‘새로운 다리가 있는 방죽’이라는 뜻이다. 영암성 동문을 이용하던 사람들이 주로 다니던 금다리(金橋, 군더리)는 현재 영암여중고 입구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1915년 일제가 만든 지적도나 1987년까지 토지대장에도 현 공설운동장 자리(역리 126)는 저수지로 표기돼 있다. 그리고 군더리 방죽에는 1975년 영암여중고 개교 때까지도 푸른 물결이 넘실거렸다. 현재 왕인박사 유적지에 당시의 사진이 걸려 있는데 설명문의 ‘구더리방죽’은 ‘군더리방죽’의 오기(誤記)다.

두 번째 방죽인 회현언(會懸堰)은 둘레가 555척(약 255미터)으로, 성의 동남쪽에 있었다. 1915년 지적도상 현 한국병원 및 영암터미널 자리 등은 역시 지(池, 방죽)로 표기돼 있다. 장흥으로 넘어가는 길을 내면서 중간을 막아 버려 터미널 자리와 한국병원 자리로 갈라져 있지만, 이 방죽물이 영암읍사무소와 영암장터 한복판을 지나 군더리 방죽으로 흘러내리면서 영암성의 자연 해자 역할을 하였다. 디지털영암문화대전에서 목포대 고용규 교수는 1451년 영암성의 1차 완공 직후에 해자를 만든 것 같다고 했지만, 실은 인공 해자를 만든 게 아니라 자연 해자가 있었던 것이다.

근거는 또 있다. 1963년 영암군지 첫머리에 여말선초에 씌어진 도선국사답산기(道詵國師踏山記)가 있는데, 영암 동헌(현 영암성당 터)에서 동남쪽 1리쯤에 있는 회현방죽과 금교방죽은 양유지(兩乳池, 두 개의 젖가슴)에 해당하고, 이 양유지는 ‘동자형(童子形)인 영암 동헌 혈(穴)자리에 젖을 먹이는 어머니 모습으로서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다(孺児恋毋之狀而自開两乳池者也)’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지금 당장 나가서 영암터미널에서 공설운동장 쪽으로 걷다 보면 신축한 농어촌기반공사 앞과 영암파출소 앞 공터에 갈대가 무성함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월출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회현방죽에 모였다가 영암장터를 지나 공설운동장으로 흘러들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영암성에는 해자를 만들지 않았던 것이다. 영암성 서북쪽은 덕진포가 해자 역할을 하였고, 영암산성 아래인 서문 앞은 적들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기각지세(掎角之勢, 앞뒤로 적을 공격하는 형세)여서 역시 해자가 필요 없었다. 영암성의 해자는 회현방죽에서 군더리방죽으로 흘러내리는 하천 하나로 충분했던 것이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일본 장사꾼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영암성과 함께 자연 해자도 훼철의 운명을 맞았다. 일본인들은 성을 허물어 자연 해자를 메우고 그 위에 건물을 지었다. 좌판과 창고와 길을 넓히면서 영암의 상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동문 밖에서 금교까지 도로 좌우에 늘어서 있던 동문밖장 장터가 이처럼 남북으로 대폭 확대되면서 명칭도 영암장으로 바뀌었다.

영암 고을이 생긴 이래 수천 년 동안 회현방죽에서 군더리방죽으로 유유히 흐르던 영암의 젖줄 자연 해자. 월출산 맑은 물이 영암성을 휘감아돌고, 그 냇가에서 빨래를 하던 아낙네들과 멱을 감던 아이들, 그리고 그들을 보면서 한가롭게 말에게 물을 먹이던 나그네의 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