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주대첩

거란의 제2차 침공(1010~1011)과 1017년(현종 8)까지 벌어진 수차례 침공이 무산됐음에도 고려를 복속시키겠다는 야율문수노의 야욕은 꺾일 줄 몰랐다. 그의 집념은 수 양제와 당 태종의 그것을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고려의 복속은 송과의 대치국면 속에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는 필수과업이었다. 고려는 신하를 자칭했지만 현종의 친조와 강동 6주 할양은 한사코 거부하였다. 그것의 실현은 고려가 거란의 광역적 통치질서에 완전히 종속됐음을 국제사회에 공표하는 것으로 1637년(인조 15) 청의 울타리에 조선이 복속한 삼전도의 치욕을 600여 년 앞당긴 꼴이 된다. 우리가 어떠한 호의를 보여든 상대가 침략해야할 이유가 생긴다면 그것은 실질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고려는 신하가 되겠다면서 군신관계의 질적 강도를 두고 거란과 평행선을 달리며 야율문수노의 권위에 흠집을 내고 있었다. 남은 해결책은 무력행사뿐이었다.

소배압과 강감찬

해가 바뀌어 1018년(현종 9) 가을에 거란은 침략군 편성을 준비했다. 그해 10월 야율문수노가 소배압을 도통(都統)에, 소굴렬을 부도통에 임명하고 야율팔가를 도감으로 삼아 고려를 정벌케 하니 이것이 거란의 소위 제3차 침공이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소배압을 소손녕으로 오기하였으나 《요사》에서는 소배압으로 기록하였다.

소배압은 993년(성종 12) 제1차 침공을 감행했던 소손녕의 형이다. 형제가 모두 야율문수노의 누이와 혼인했고 야율문수노 또한 소배압의 딸과 혼인했으니 소배압은 야율문수노의 매부이자 장인이 된다. 동생은 병 든 아내를 두고 궁녀와 정을 통한 일로 장모 소태후에게 죽임을 당했으나 소배압은 행정과 군사에서 두각을 드러내 중신으로 대우받았다. 소굴렬은 1016년(현종 7) 야율세량과 함께 고려군 수만 명을 참살한 곽주전투에 참가한 바 있다.

한편 재침 분위기를 감지한 고려 역시 전쟁 준비에 분주했다. 1018년(현종 9) 현종은 서북면 행영도통사 강감찬을 상원수(上元帥), 대장군 강민첨을 부원수로 임명하고 208,300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영주(평안북도 안주)에 주둔케 하였다.

강감찬은 작은 체구와 못생긴 얼굴을 지녔다. 청렴하고 검약하여 집안일을 돌보지 않았다는데 그 때문인지 더럽고 낡은 의복을 입었다. 그는 지난 2차 침공 때 현종의 몽진을 건의한 이후 현종의 신임을 받아 칠순의 나이에 총사령관의 직책을 맡았다. 강민첨은 조원 등과 함께 지휘부가 와해된 서경(평양)의 혼란을 수습했으며, 1012년(현종 3)에는 경상북도에 침략한 동여진 해적무리를 격퇴한 바 있다. 그는 서생 출신으로 궁술과 기마술이 장기는 아니었으나 ‘의지와 기개가 굳세고 과감하여 전공을 세웠다’는 평을 받았다.

흥화진 전투

고려의 기록에 따르면 거란이 동원한 침략군 규모는 10만 명으로 소배압의 전략목표는 고려군과의 충돌을 최소한 채 신속한 기동으로 개경, 즉 현종을 포획하는 것이었다. 이는 병자호란 시기 청군의 목표와도 일맥상통했다.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에 갇혔듯 개경을 벗어나지 못한 현종을 억류하거나 탈출구를 봉쇄한다면 무게추는 급격히 기울게 된다.

그러나 소배압의 진군은 순탄치 않았는데 12월 10일(음) 고려군은 압록강을 건너온 적을 공격해 초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강감찬 열전〉에서는 이때의 승리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흥화진(興化鎭)에 이르러 기병 12,000명을 뽑아 산골짜기에 매복시킨 후에, 큰 동아줄을 소가죽에 꿰어서 성 동쪽의 큰 냇물을 막고 그들을 기다렸다. 적들이 오자 막아 놓았던 물줄기를 터놓고 복병을 돌격시켜 크게 패배시켰다.’

수공을 활용해 이겼다는데 정말로 그러했는지에 대해선 의구심이 있다. 당시 냇물을 막을 정도로 소가죽이 풍부하고 또한 물을 가두는 기술을 보유했는지 알 수 없으며 특히 적의 이동경로에 수공을 정확히 감행할 수 있는지 여부가 주요의문점으로 손꼽힌다. 다만 과장이 있어도 수공을 시도한 것이 사실이라면 적군의 발을 묶어 속도와 대열을 흐뜨러뜨리고 그 틈을 노려 요격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어쨌든 흥화진은 이번에도 승리를 약속하는 약속의 전장이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