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영암군의원 김기천

“내 평생 농사짓고 살면서 올겨울 같은 날씨는 처음이다”

얼마 전 친환경협회 회의에서 들은 선배 농부의 말이다.

평생 친환경농사를 지으며 산전수전 다 겪은 그가 올해 농사 걱정을 드러내자 같은 자리에 있던 다른 농민들도 한마디씩 거들고 나섰다. 2월에 정식한 멜론 모종이 죄다 시들어 버렸다, 귀리 밀 보리 같은 동계작물이 습해를 입어 노랗게 잎이 변해가고 있다, 독새풀이 얼마나 무성하게 자랐는지 마치 논바닥이 잔디밭 같다, 올해처럼 따뜻한 겨울 후에는 어김없이 병충해가 맹위를 떨칠 것이다.... 하나같이 근심 가득한 목소리였다.

농협에서는 안타까운 소식을 더 들어야 했다. 채소 농사를 짓는 후배는 계속되는 비에 로타리작업을 할 수 없어 올봄 노지 알타리 농사를 아예 포기했다고 한다. 하우스 딸기 농사가 전부인 선배는 지난해에 비해 수확량, 화방 수, 품질 모든 면에서 예년보다 크게 나쁜 작황에 앞이 캄캄하다며 한숨을 토해냈다. 원래 2월초가 적기인 감자는 싹이 다 터버린 상태로 아직까지도 심지 못한 농가가 허다하단다.

1월말에 농민신문이 전한 시설작물 피해도 처참하다.

참외 수박 오이 딸기 멜론 채소 하우스감귤이 고사, 생육 부진, 기형과 속출, 빈번한 병충해 발생으로 수확량은 감소하고 품위는 저하되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에도 겁나는 소식이 하나 더 들려왔다.

지난해 기록적인 냉해 피해를 입었던 금정 대봉감나무에서 새움이 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뿔싸! 그 다음이 어떻게 될지는 불을 보듯 환하다.

위기의 겨울을 증명하는 기후지표가 뚜렷하다.

올겨울 일조량은 평년 대비 85% 수준으로 최근 10년 중 가장 적었다.

2022년 겨울에 비하면 무려 128.6시간이나 적었는데 한달치 일조량이 사라져버린 셈이란다. 1월 평균 기온은 3.6도로 역대 세번째로 따뜻했다. 12월부터 2월까지 전남 평균 강수량은 평년의 3배에 달하는 260밀리나 내렸다. 강우 횟수나 강우량으로 보면 겨울장마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 분명한 징후를 ‘이상’기후란 말로 퉁칠 수 없다.

직설적으로 ‘기후 위기’라 정의해야 마땅하다. 상황은 긴박하고 시간이 없다.

중앙정부를 향해 재해보험의 재설계를 요청하고 피해 농가를 지원하는 방안을 설득하는 일부터 행정과 농민이 힘을 모아야 하겠다. 우승희 군수가 피해 농가를 방문해 현장 목소리를 들은 것은 참 잘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더 적극적이고 치밀한 대응전략이 필요하다.

유관기관과 협력해 객관적인 기후지표를 확보하고 상시적인 예찰 결과를 축적해야 한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예측 가능한 피해 범위와 구제 방안, 새로운 농업전략을 담은 매뉴얼을 만들어야 한다. 피해가 발생할 때마다 단발적으로 대응하기에는 우리 앞에 놓인 위기의 선례와 징후가 엄혹하다. 한마디로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정의로운 대전환을 우리군부터 준비하자는 뜻이다.

우리 농민들이 감당할 몫도 크고 무겁다. 나는 광화문과 세종 정부청사 앞에서 열린 기후파업에 두 번 동참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이들 중 유독 어린이와 청소년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진지하고 열성적이었는데 지금의 기후 위기를 자신들 생존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위기 앞에서도 느슨하고 한가로웠던 나는 부끄럽고 죄스럽기만 했다.

<25시>의 루마니아 작가 게오르규는 시인을 ‘잠수함 속 토끼’에 비유했다.

잠수함 속 산소 농도가 옅어지면 토끼가 가장 먼저 그것을 느끼고 산소가 사라지면 토끼는 인간보다 6~7시간 먼저 죽는다고 한다. 토끼가 숨쉴 수 없는 잠수함에서 사람도 못 살듯이 시인이 괴로워하는 세상은 살만한 세상이 아닌 것이다.

나는 이 절박한 기후 위기의 시대에 농민이야말로 시인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농민은 누가 뭐래도 바람과 천둥과 비와 햇살과 우주를 노래하는 생명의 시인 아니던가?

그리고 그것들이 울부짖고 신음하는 소리를 가장 먼저 듣고 일어서는 들풀 같은 존재들 아니던가? 경각에 달린 이 지구와 뭇생명들의 목숨을 되살리는 일에 무엇이라도 하고 나서는 봄이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