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복하느냐 마느냐

12월 무렵 거란이 사신 유경과 포로로 잡은 노의를 서경성에 보내 항복을 요구하자 서경유수 원종석이 이를 따르기로 결정하고 항복의 표문을 지었다. 중랑장 지채문(智蔡文)이 이 소문을 듣고 군사들을 이끌고 달려와 항전을 주장했으나 거부당했다. 한편 성 내부에서도 최창이 성을 지킬 것을 주장했으나 역시 거부당했다. 이에 최창은 지채문과 은밀히 논의하여 유경과 노의를 살해하고 표문을 뺏었는데, 이 일로 지채문은 쫓겨나 성 남쪽에 진을 치게 된다.

한편 현종은 강조의 패전 소식을 듣고 야율문수노에게 표문을 지어 올렸다. 이에 야율문수노는 기뻐하며 노획과 약탈을 금하고 마보우를 개성유수로 삼아 기병 1,000기를 주어 호송하게 하였다. 또한 한기로 하여금 기병 200기를 주어 서경으로 보냈다. 바야흐로 서경을 함락하고 고려 왕을 복속시킨다는 야율문수노의 뜻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마침 동북계도순검사 탁사정(卓思政)의 부대가 서경에 당도하며 상황이 급변했다. 탁사정은 지채문과 함께 입성하여 항전의 뜻을 내비쳤고 이에 성병(城兵)들도 일전 태세를 갖추었다. 이 내막을 모르고 서경에 도착한 한기와 기병 200기는 모두 죽거나 포박당해 한 사람도 돌아가지 못했다. 또한 마보우가 거느린 1,000기 역시 지채문에 의해 패퇴하였다.

치열한 서경 공방전

한참의 소란 끝에 서경의 고려군은 일전 태세를 갖추었다. 여기에 승려 법언(法言)이 승병들을 이끌고 탁사정의 부대에 가세하였다. 탁사정은 9,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임원역 남쪽에서 맞붙어 3,000여 급을 참수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함께 싸웠던 법원은 전사하였다. 다음 날에는 지채문이 나서 승리를 거두자 성에서 이를 지켜보던 병사들이 기세를 주체 못하고 추격에 나섰다. 앞다투어 적을 추격하던 고려군은 어느덧 마탄에 이르렀는데 오히려 역공을 받아 패하였다. 결국 성은 포위되고 고려군은 틀어박혀 농성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거란의 포위와 계속되는 농성에 두려움을 품은 탁사정은 최악의 무책임한 행동을 저지르고 만다. 탁사정이 장군 대도수(大道秀)에게 속여 말하기를 “그대가 동문으로, 나는 서문으로 나가 앞뒤에서 협공하면 이기지 못할 리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대도수가 이를 믿고 나가 싸우는 사이 탁사정은 휘하의 병사들을 이끌고 야반도주를 감행하였고 대도수는 항복하였다.

대도수는 발해 유민 출신의 장수로 17년 전 거란의 제1차 침입 당시 안융진 전투에서 승리하여 서희가 협상에 나설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영웅이었다. 그러나 그는 탁사정의 배신으로 원수의 나라 거란에 붙잡혔고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이처럼 아군이 궤멸하고 지휘부마저 와해되자 성내는 순식간에 공포와 혼란에 휩싸였다. 장수들은 점을 쳐 길조를 얻고 조원을 병마사로 추대해 다시 항전 태세를 갖추었다.

양규의 곽주성 탈환

이렇게 서경이 격동하는 동안 흥화진에서는 양규가 은밀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양규는 700여 명의 결사대와 함께 흥좌진을 빠져나와 통주까지 이동하며 흩어져있던 병사 1,000명을 규합했다. 양규의 공격 목표는 거란의 후방거점인 곽주성이었다. 고려군은 1700여 명, 반면 곽주를 방비하는 거란군은 6,000여 명에 달하였다. 통상적으론 어림도 없는 공성 시도였겠으나 12월 16일 양규의 결사대는 적을 전멸시키고 곽주 탈환에 성공한다. 구체적인 공성 과정은 나와있지 않는데 ‘밤중에 들어가(夜入)’ 라는 대목을 보아 야음을 틈탄 잠입과 기습으로 추정된다. 승전 후 양규는 곽주에 있던 남녀 7,000여 명을 통주로 옮겼다.

현종의 몽진과 거란의 개경 함락

한편 같은 날 야율문수노는 서경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군수물자가 모이는 곽주의 함락으로 순식간에 보급이 끊길 위기에 몰린 야율문수노는,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개경을 직접 노렸다. 한편 지채문 등이 서경에서 패했다는 보고를 받은 개경의 신료들은 항복에 대해 의논하였다. 이때 강감찬(姜邯贊)이 홀로 반대하며 현종에게 남쪽으로 피난할 것을 권하였다. 개경에 돌아온 지채문은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겠다”라며 왕의 호위를 맡았다.

12월 28일 밤에 현종은 왕비들과 함께 지채문, 채충순과 금군(禁軍) 50여 명의 호위를 받으며 개경을 빠져나갔다. 그러면서 여진족 학살 사건에 대한 책임으로 유배를 보냈던 하공진을 다시 불러들여 거란의 사신으로 보냈다. 피난의 여정은 험난하기 그지없었다. 도중에 반란군의 습격을 받았고 심지어 거란군에 보낸 하공진이 붙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왕을 호종해야할 신료들이 도망쳐버리기도 했다. 가장 가까이 왕을 모시는 환관, 궁녀들도 마찬가지였다. 현종 곁에는 지채문과 채충순, 장연우 등 몇몇 신하들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1011년 1월 1일 현종이 경기도 광주에 머무를 때 거란 본대가 개경에 입성했다. 이들은 태묘(太廟, 종묘), 궁궐, 민가 등에 방화하여 철저히 파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