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 전쟁

강조의 정변과 거란의 침입

세 차례가 넘는 침공을 감행한 장본인은 거란(요)의 제6대 황제인 성종(聖宗) ‘야율문수노(耶律文殊奴, 또는 야율융서)’이다. 그가 고려 침략을 언제부터 계획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1009년 12월 정치적 스승이자 모후(母后)인 소작(蕭綽, 예지황후 소씨)의 사망을 계기로 홀로서기에 나선 그에게 고려는 권위 확립을 위한 좋은 먹잇감으로 보였을 것이다.

때마침 1009년 3월 고려에서 강조(康兆)가 목종(穆宗)을 폐위하고 현종(顯宗)을 옹립하는 정변이 터지며 비정상적인 정권 교체가 벌어졌다. 이듬해에는 고려인들이 내조하러 방문한 여진 사람 95명을 학살해버리자 여진이 이 사실을 거란에 호소하였다. 여진의 호소를 들은 야율문수노는 신하들에게 “고려의 강조는 임금을 시해한 큰 역적이니, 마땅히 군사를 보내어 죄를 묻겠다.” 말하며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었다.

고려에서는 거란의 침공에 대비해 강조를 행영도통사로 임명하고, 상장군 인소광을 도병사로, 소부감 최현민을 좌군병마사로 임명하여 30만 병력을 동원하여 통주(평안북도 선천)에 주둔시켰다. 그리고 1010년 11월, 야율문수노는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몸소 고려 침공에 나서니 이것이 거란의 제2차 침입이다. 이 40만이란 규모가 너무나 비대하여 오늘날에는 과장된 수치라 여겨지지만 황제가 친정에 나선 만큼 대규모였음은 분명해 보인다.

강조의 패전과 죽음

압록강을 도하한 거란군의 첫 목표는 강동6주 중 최북단인 흥화진(평안북도 의주)이었다. 이곳의 방어책임자는 도순검사 양규(楊規)로, 그는 항복 요구를 거부하고 응전 태세를 갖추었다. 성의 함락이 어려울 것이라 판단한 야율문수노는 20만을 인주(의주) 남쪽의 무로대에 주둔시켜 후미를 대비한 뒤 나머지 20만을 이끌고 통주로 남하하였다. 이를 알아챈 강조는 통주성 밖으로 나와 병력을 셋으로 나누어 강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는데 자신은 통주의 서쪽 삼수채(三水砦)에 주둔하였다. 고려군 30만과 거란군 20만, 우리 역사상 가장 거대한 회전으로 손꼽히는 이 전투는 고려의 처참한 패배로 끝났다.

처음에는 고려군이 몇 차례 승전을 거두었다. 강조는 검거(劍車, 또는 검차)를 일렬로 배치하여 공격해오는 거란군을 맞아 반격해 격퇴하였다. 그러나 거란군이 작전을 바꿔 야율분노가 이끄는 별동대로 하여금 삼수에 자리한 고려군의 본영을 급습하자 진에 균열이 생겼고 그 틈에 거란의 본대가 정면에서 돌격해오자 이내 삼수의 본영이 무너졌고 강조는 들이닥친 거란군에게 포박되었다. 《고려사절요》에서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야율문수노는 강조의 결박을 풀어주고 자신의 신하가 될 것을 요구하였으나 강조는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살을 찢는 고문을 자행하며 다시 물었으나 강조는 끝끝내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강조를 포기한 야율문수노가 부하 이현운에게 같은 질문을 하자 이현운은 “두 눈이 이미 새로운 해와 달을 보았는데 하나의 마음으로 어찌 옛 산천을 생각하겠습니까.” 라고 답했다. 이를 들은 강조는 분개하여 이현운을 걷어찼고 이내 죽임을 당했다. 지휘부가 붕괴된 고려군은 도주하던 중 거란의 추격대에게 처참하게 도륙당했다. 이때 그 수가 3만에 달하였다. 다행히 김훈, 김계부, 이원, 신녕한 등의 장수들이 원항령에 병력을 매복하여 싸워 추격대를 저지했고, 통주성 역시 항복을 거부했다.

한편 거란은 흥화진을 사수 중이던 양규에게 강조의 명령인 것처럼 위조한 편지를 보내 항복을 요구했다. 그러나 양규는 “나는 왕명을 받고 왔지, 강조의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다.” 라며 거부했다. 강조의 주력부대를 격멸하고도 고려의 성들이 항복을 거부하자 야율문수노는 통주와 가까운 곽주(평안북도 곽산)를 공격해 함락시켰다. 곽주는 평안북도의 남서쪽에 위치한 해안지대로 야율문소는 이곳을 후방거점으로 삼고 서경(평양)으로 진군했다.

<다음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