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았다. 청룡의 해라니 활기 넘치는 도전과 성취를 기대할 만하다.

새해라고 해서 특별한 감흥이 일지는 않는다. 어제처럼 오늘도 해가 떠올랐고, 어제 다 읽지 못한 책이 오늘도 머리맡에 놓여 있다. 특별한 사유가 생기지 않는 한 나는 올해도 사계절의 다채로운 변화와 분주한 농사일, 복잡다단한 인간관계 속에서 부침을 거듭하며 살아갈 것이다.

각별한 목표를 세운 것도 아닌데 새해 첫 달 마음이 무겁다. 영원한 휴머니스트를 꿈꾸면서도 정작 변변한 인류애 한번 행동에 옮기지 못한 비루한 처지다. 그렇다쳐도 지난해 내내 살육과 폭력의 참화 속에서 가족도 미래도 잃어버린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아이들에게서 마음을 뗄 수가 없다. 지난 연말에 한 후배와 이 곳 영암에서 팔레스타인을 향해 행진하자고 호기를 부렸으나 그 결심에서 한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겠냔 말이다. 가자지구, 지옥같은 땅에서 벌써 만 명의 어린이가 학살당했다는데 지구 반대편 이 땅은 평온하기만 하다. 아니 무심하고 나른하다. 그 뿐인가? 새해 벽두부터 한반도의 전쟁 위험을 경고하는 섬뜩한 주장들이 속속 전해지는데도 긴장감 제로 상태다. 무뎌질 대로 무뎌진 감각은 비상한 기후위기 앞에서도 잠잠하고, 야당 대표조차 목숨을 위협받는 극단의 정치에 애써 눈을 돌리고 만다. 사정이 이러하니 무고한 시민의 죽음, 가난과 불평등에 짓눌린 약자의 소리없는 아우성에 무슨 연민이 일겠는가?

합자하지 말라, 동업하지 말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듣는다. 합자한 조합이 깨지고 동업자끼리 연합한 당이 조각나버린다. 합심한 부부가 갈라서고 믿음으로 하나된 교회가 갈기갈기 찢겨 나간다. 인사를 앞둔 관청엔 동료 협잡꾼의 투서가 난무하고, 공천을 얻기 위해 동지의 치부를 들쑤시는 일은 무용담으로 포장된다. 나는 너하고 결단코 함께 살 수 없다는 악다구니를 부르대는 것이다. 바로 여기,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세상이다. 늘 그랬다. 함께 하겠다는 결심은 고색창연하고 상대 마음을 훔치고도 남을 만큼 현란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같이 하겠다는 다짐은 간데없고 원망과 배신, 환멸과 자포자기의 깃발만 허탈하게 나부껴댄다.

그리고 다시 새해다. 아무도 못 믿겠고, 자신조차 믿을 수 없다는 세태를 이어가는 2024년 새해 벽두에 나는 다시 나를 일으키고 격려하고 싶다. 절박하다. 기어이 다시 함께 하겠다. 더 자주, 더 널리, 더 각양각색으로 엮이고 묶이고 포개지고 말겠다. 내가 이룬 성취가 결코 내 몫이 아니란 것과 그대 없이는 한발짝도 뗄 수 없었단 사실을 선포하며 기어이 기억하겠다.

더 많이 사랑하며 사는 꿈도 꾸겠다. 아니다. 지극히 소소한 일이라도 제대로 한번은 보듬고 사랑하겠다. 세미한 소리에 바짝 귀를 대고 듣기라도 하고 싶다. 가슴이 일으켜 세우는 결심 앞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행동하는 일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며 살아보겠다.

함께, 사랑하는 일에 마음을 다하듯이 나를 돌보고 아끼는 일에도 열심의 끈을 놓지 않겠다. 더 많이 읽고 자주 쓰고 깊게 사유하며 군더더기 없는 사람으로 나이 들어가기를 소망한다.

무엇보다 참 농부의 길을 더 우직하게 잘 걸어가고 싶다. 다시 씨 뿌리기를 어느새 열다섯 번째다. 농사짓는 일이야말로 함께, 사랑하며, 진심을 다하는 법을 가르치는 최고의 스승이라 믿는다. 더군다나 나는 지구를 지키는 농부이니 고맙고 행복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