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우리 역사에는 왕조 교체가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5,000년의 유구한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왕조 교체는 전혀 많은 편이 아니었다. 이것은 우리 왕조들의 수명이 길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 왕조의 수명은 길어야 300년이었다. 일본은 중앙집권제가 아닌 봉건제였으므로 왕조 수명을 수평적으로 비교할 수 없다.
우리 역사에서 왕조 교체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대부분의 왕조 교체는 국가 통합적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왕조가 교체될 때마다 자유와 평등과 민주 등의 가치가 확산되었다. 다시 말해 우리 민족은 왕조 교체를 통해 진보를 이루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역사는 (고)조선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고조선은 당시 우리 민족이 세운 여러 국가 중 중심 국가였을 뿐 통합국가는 아니었다. 같은 시대에 부여, 고구려, 옥저, 예맥, 마한, 진한, 변한 등의 여러 나라가 대륙의 동북과 반도 곳곳에 기립해 있었다. 이런 점에서 ‘고조선시대는 열국시대(한영우)’라는 규정은 타당하다.
열국 중에서 가장 수명이 길었던 고구려는 백제, 신라, 가야 등과 함께 4국시대를 형성하여 약 500년 동안이나 지속된다. 그러던 중 가야가 신라에 병합되어 3국시대가 정립되어 약 150년 동안 이어졌고 이후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와 발해가 대동강을 경계로 한 2국시대가 약 200년 동안 전개되었다.
10세기 초 고려는 후삼국의 분열을 평정하면서 거란에 패망한 발해 유민까지 흡수하여 우리 민족 최초의 단일통합국가를 이루었다. 그리고 14세기 말인 1392년에 조선이 건국되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조선왕조는 519년의 최장수를 누렸다. 결국 고려 475년과 조선 519년을 합하여 우리 민족은 약 1,000년 동안이나 단일통합국가를 지속시킨 셈인데, 이런 역사는 전 세계사에서도 아주 희귀한 사례이다.
조선통합은 고려통합보다 우월한 가치를 만들어 낸 통합이었다. 물론 조선은 대외적으로 명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질서에 편입되어 건국되었다. 그리고 명은 원처럼 세계적 제국은 아니었다. 그러나 명은 여전히 자국을 천하의 중심이라고 자부했고, 조선은 그 천하 중 모범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것을 떠받친 것은 성리학과 농업이었다. 여기에다 조선은 세종 때 영토를 대폭 확장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고려의 국가 통합은 고구려, 백제, 신라 3국 유민의 통합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이것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천명한 것과도 관련된다.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했으니 당연히 백제와 신라의 유민은 소외감과 반발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이 국호를 (고)조선과 같은 ‘조선’으로 한 것은 이런 연유 때문이기도 했다. 삼국은 모두 (고)조선이라는 동일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조선은 인식한 것이다. 그리고 조선은 실제로 고구려, 백제, 신라를 대등하게 인식하는 역사서를 기술하기도 했는데, 그것이 성종 때 출간한 <<동국통감>>이다.
또한 조선은 단군조선만을 특별히 강조하지 않았다. 중국에서 온 기자와 위만 그리고 거란, 여진 등의 북방 귀화인을 배려했기 때문이다. 조선이 강자였다는 것은 이런 포용성과 관대성으로도 드러난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모두 단군의 후예로서 단일민족이라는 것은 일제 강점기에 나타난 것이다. 일제의 황국사관과 식민사관에 결연히 대응하기 위해서 혈통의 단일성을 강조한 취지는 나빴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1910년 8월 29일은 조선이 519년 만에 완전히 결딴난 날로서 말 그대로 국치일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39년 만인 1948년에 우리는 대한민국과 조선공화국으로 갈라져 분단되었다. 1948년은 1910년보다는 나을지 몰라도 우리 역사에 치욕의 해로 기억될 것이다. 고려와 조선 내내 지속되었던 단일통합국가시대가 다시 2국시대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히 1,000년 전으로 물러선 퇴보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