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다림질을 좋아한다. 가사 노동 중에 다림질 만큼 드라마틱한 결과를 얻는 일이 드물다. 청소나 빨래, 음식 만들기와 비교하면 다림질은 투자하는 노동력과 시간 대비 효율성이 높은 가사 노동이다. 난 효율성과 경제성이 높은 일을 좋아한다.

적게 일하고 많이 벌자 고로 남들과 같은 시간(하루8시간 주40시간) 일하고 많이 벌려면 시간의 부가가치를 높여 남다른 결과를 내어야 하는 자본시장에서 직장생활 30년하면서 선택의 기준이 생겼다. 예로 퇴근해서 가사를 돌보는 것보다 직무를 선택하여 성과를 내는 쪽으로 시간을 쓰고, 이력을 만들었다. 매사 그런 유사한 기준으로 선택했고 다행히 큰 실패나 좌절없이 임원으로 퇴임했다.

그렇게 무늬만 주부로 살면서도 다림질은 참 좋았다. 대게는 다림질을 세탁소에 맡겼지만 머리 복잡하고 맘처럼 일이 풀리지 않을 때 난 명상하듯 거실에 다리미판을 세우고, 의식처럼 분무기와 다리미 셋팅하고 다림질을 했었다. 백색 가전에 크게 관심이 없는 난 결혼할 때 혼수로 장만했던 세탁기, 김치냉장고를 아직 쓰고 있으며 그것들은 내 딸아이보다 나이가 많다. 그런 내가 유일하게 그립감과 무게를 고려해 신중하게 다시 장만한 것이 다리미다. 물론 다리미판도 신중하게 구입했다.

이제는 명상보다는 취미처럼 시간에 쫓기지 않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다림질을 즐기려고 영암 하숙살이 짐에 가장 먼저 챙겼던 것이 다리미였다. 그렇게 챙겨온 다리미는 아직 꺼내지 못하고 있다. 인턴기자로 시작된 나의 귀촌은 직장 초년생 이상의 긴장감으로 여유가 없다. 그 긴장감은 갈수록 날이 선다. 갈수록 알게 되는 기자의 역할은 막중하고 부족한 나의 직무 능력과 소양은 더 선명하게 보이니 낙담도 커지는 게 사실이다.

영암의 현안과 우리 이웃의 관심사를 이해하고 같은 정서로 느낄 수 있으면 좋겠는데 생각처럼 쉽지 않다. 단편적으로 보이고 들리는 내용 속에 있는 서사를 잘 알지 못하고 섣불리 재단하고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고 신경 쓰고 주의한다.

알지 못하는 일에 신념이 더해지면 대책이 없다.

난 여유롭게 다림질을 즐기고 싶은데 지금은 사치인 듯하고 온전히 만끽할 수 있을 때까지 지금은 잠시 아껴두고 있다.

며칠전 비가 많이 오는 늦은 저녁 맨발로 욕실에서 씻고 실내화를 신으려고 무심히 실내화를 들다가 실내화 밑에 검은 그림자를 봤다. 지네였다. 말로만 듯던 지네였다. 포털 사이트에서 보던 이미지보다 훨씬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혐오스러웠다. 굵기도 굵고 크니 움직임도 대문자 S자로 기운차다. 그대로 서서 잡지도 움직이지도 악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도 등골이 오싹하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었는데 방심한 사이 허를 찌르듯 그렇게 봤다. 어디로 갈지 모르니 현장을 벗어날 수도 없고 하숙집 사장님께 전화를 걸자니 너무 늦은 밤에 실례려나 찰나에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눈감고 욕실 실내화를 들어 몇번 내려쳤으나 스펀지 실내화로는 타격감이 적은 듯 움직임이 더해졌다. 여러번 때리고 그 많은 발의 움직임이 멈추기를 욕실 복판에 맨발로 서서 기다렸다. 난 늘어진 지네를 이를 악물고 숨을 참으며 정리했다. 내 사정은 안중에도 없이 창을 때리는 빗소리는 참 무심했고 야멸차게 요란했다.

비오는 심야에 욕실 대청소를 했다. 겁나 뜨거운 물로!! 그 덥고 습한 비오는 여름 밤에!!

난 그날 밤 뜬눈으로 밤을 새우면서 기자로도, 귀촌인으로도 어느 것 하나 번듯하지 않고 마뜩치 않아 괜스레 서글프고 서러워 울었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난 지금도 여전히 유유자적 다림질을 즐길 날을 고대하고 있다.

<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