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당 태종 이세민(599~649)과 조선 태종 이방원(1367~1422)은 생존 연대는 700년 가까이 차이가 있지만 여러모로 비슷하다. 개국에 가장 큰 공을 세우고도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점, 그래서 형제를 죽이고 보위를 양위 받은 점, 보위에 올라서 아버지를 ‘태상’으로 모신 점도 같다.
두 사람은 각각 50세와 55세의 길지 않은 삶을 살았다. 하지만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두 지도자의 놀라운 치적이다. 그들은 내치는 물론 외치에서도 성공하여 초창기 국가 기틀을 확실히 다졌다.
당은 천하를 차지하기까지 7년 동안 여섯 차례의 큰 전쟁을 치렀는데, 이세민이 그 중 네 차례를 이끌어 모두 승리하였다. 맏형 이건성도 참전하여 전투를 지휘했지만 건국 과정에서 일등 공로자는 이세민이었다. 그러나 적장자에 밀려 황태자 자리는 이건성에게 돌아갔다.
형제의 피를 뒤집어쓰며 28세에 옥좌에 앉은 이세민은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주로 평가 받는다. 그는 근검절약을 생활화하고 황족과 대신들도 이를 본받도록 했다. 그는 공신들을 존중하는 한편, 문벌은 약해도 실력이 뛰어난 인재들을 계속 발굴해서 원로 공신들과 균형을 맞췄다.
이세민은 무인의 삶을 살았으나, 태자로 책봉되고부터는 당대의 학자들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책에 묻혀서 살았다. “천하는 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며, 만인의 것이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며, 백성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것을 정치의 근본 목표로 삼았다.
조선 태종 이방원은 어떠한가? 그는 조선 왕조 개창에 가장 많은 공을 세웠음에도 정도전 등에 의해서 견제되었다. 제1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재기에 성공한 그는 왕권의 확립을 위하여 계속 숙청을 단행하였다. 하지만 그는 500년 조선조 국가 운영의 밑그림을 완성한 군왕이었다.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은 가문에서 유일하게 문과에 급제(16세)한 수재였다.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왕조 국가에 맞는 여러 시스템을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국가의 행정체계를 정비하여 6조 중심 체계를 완성하여 왕의 국정 장악력을 강화하였다. 또한 오늘날까지 지방제도의 근간이 되어온 8도 체제를 정비하였고 국가 경영에 필수적인 인구와 군적의 파악을 위해 호적법을 정비하였다.
태종은 생전인 1418년(태종 18년) 8월에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었다. 이 과정에서 태종은 군왕으로서, 아비로서 비장한 선택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장자인 세자 양녕대군을 폐위시키고, 대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만세(萬世)의 대계를 위해 그리고 어렵사리 창건한 왕조의 수성을 위해서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셋째가 둘째와 달리 ‘술을 할 줄 알고 책을 좋아한다’는 것도 이유 중의 하나였다.
대신들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단행된 왕세자의 폐위에 대해 태종은 천명임을 강조하면서, ‘후계자를 어진 이로 삼는 것은 고금의 대의’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비 입장에서는 통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실록에는 당시 태종의 정황을, “임금이 통곡하여 흐느끼다가 목이 메이었다”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그는 셋째 아들 충녕을 왕세자로 삼아 지극정성을 다하여 후계자 훈련을 시켰다.
반면에 당 태종 이세민은 후계자 선정에 실패했다. 그는 방탕적 기질이 있는 맏아들 이승건을 황태자로 세웠다. 황태자는 끝내 황제 자리에 일찍 앉으려고 역모까지 꾸몄다. 그를 내쫓은 당태종은 넷째아들 이태에게 태자 자리를 주려고 했으나, 처남인 장손무기를 비롯한 원로들이 이태의 비리를 들추며 아홉째 이치를 미는 바람에 결국 이치에게 제위를 물려준다.
원로들이 이태보다 역량이 부족한 이치를 밀었던 이유는 어린 황제 뒤에서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늙은 당태종은 젊어서라면 결코 넘어가지 않았을 수에 걸려 역량이 떨어지는 아들에게 대업을 맡겼고, 태종을 이은 고종 이치는 아버지의 후궁이었던 측천무후에게 의지하면서 한 차례 왕조가 단절되는 사태를 초래했다. 이것 말고 당태종의 고구려 원정도 커다란 실책이었다.
이에 비해 조선 태종은 어떠했는가? 그는 미리 세종에게 왕위를 양도하여 실전 훈련까지 시켰다. 그는 임금인 아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지도자다운 유언을 남겼다.
“이 세상 모든 악업은 내가 짊어지고 갈 테니 주상은 성군이 되시오”
이런 말은 아무 지도자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태종 이방원이어서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태종은 자기에게 찾아온 기회가 유리하든 불리하든, 또는 자기에게 주어진 그 어떤 권력일지라도 한 틈의 누락도 없이 공적인 가치로 전환시킬 줄 알았던 비범한 군주였다. 무엇보다도 태종이 비범했던 것은 자신의 생전보다도 사후를 더욱 중시한 역사 전향적인 지도자였다는 점이다.
중국인은 당에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한국인은 조선을 폄하하기에 바쁘다. 개중에는 당태종 이세민은 위대한 군주라고 하면서도 조선 태종 이방원은 얕잡아본다. 당태종의 거사는 ‘현무문의 변’이라고 하고 조선 태종의 거사는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조선을 폄하하는 사람들은 골육상쟁이라는 말도 곧잘 쓴다.
역사 전향적인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 오늘, 태종 이방원을 생각해 본다. 태종이 없었더라면 100퍼센트 세종도 없었다. 세종은 성군으로서 내가 본받아 따르고 싶은 인물이지만, 태종 이방원은 내가 감히 범접할 수도 없는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