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함흥차사[咸興差使] : 심부름을 간 사람이 소식이 아주 없거나 또는 회답이 좀처럼 오지 않음을 비유하는 말. 조선 태조 이성계가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에 울분하여 왕위를 정종에게 물려주고 함흥으로 가버린 뒤, 태종이 그 아버지의 노여움을 풀고자 함흥으로 여러 번 사신을 보냈으나 이성계는 그 사신들을 죽이거나 잡아 가두고 보내지 않았으므로, 한번 가면 깜깜소식이라는 고사에서 비롯되었다.(두산백과사전)
이것은 내가 어린 시절 학교 다닐 때 역사 수업에서 들은 이야기와 일치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의문을 품었다. 도무지 타당성(plausibility)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왕의 아버지라고 해도 죄 없는 심부름꾼을 함부로 죽일 수 있었단 말인가? 이것은 태조가 태종을 미워했다는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논점이다.
함흥차사 이야기는 이중환의 <<택리지>>와 이유원의 <<임하필기>> 등에 들어 있다. 특히 이중환의 택리지에 들어 있는 이야기는 약간 더 허구적 느낌이 강해서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하다. 과연 함흥차사 이야기는 사실일까?
태종에게 불만을 품은 태조 이성계가 서울을 떠나 함경도에 갔던 것은 사실이다. 가뜩이나 정몽주를 죽여 미움을 산 터에 형제까지 죽인 태종을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니, 태종이 왕 노릇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태조가 서울을 떠나 변방에 가 있는 것은 태종에게 매우 난감하고도 부담스러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태종으로서는 자기의 집권을 정당화하고 정권을 안정시키려면 태조의 지지가 필요했다. 결국 태조가 서울을 떠난 것은 태종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인 행동이었다.
그런데 태조는 함흥 한 곳에만 머물렀던 것이 아니다. 그는 함경도와 경기도 등의 여러 사찰을 전전하며 거처를 옮겨 다녔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도 태조의 행방을 알지 못해서 문제가 되기도 한 적이 있었다. 태종이 여러 차례 태조에게 사람을 보내 환궁을 간청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심부름 온 사람을 죽이다니,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태조가 심부름 온 차사를 죽였다는, 그것도 10번씩이나 죽였다는 이야기는 정통 역사 기록에 존재하지 않는다. 정통 기록들에는 태종의 간곡한 요청을 받은 태조는 못 이기는 척하며 잠시 궁에 돌아왔다가 다시 떠나곤 했다고 되어 있다.
조사의의 난이 일어난 것은 1405년이다. 조사의는 함경도에서 거병하여 태종을 처단하겠다고 기세를 올렸다. 배후에 태조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태종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나가 난을 제압했다. 그런데 사후 태종은 반역자들에게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 자기 아버지가 시킨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태조는 조사의의 반란군이 거의 실패하고 있는 때에 슬며시 개경 궁으로 되돌아왔다. 이로써 부자간의 대립은 아들의 승리로 낙착되었다. 태조는 나라의 안정을 위해 아들의 왕위를 인정해 주었다.
태종은 태조에게 자주 문안을 올리고 여러 차례 아버지를 주빈으로 하는 연회를 베풀었다. 그는 아버지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잠시 개경으로 옮겼던 도읍을 한양으로 재천도한 데에는 아버지의 마음을 얻으려는 목적도 있었다. 한양은 태조가 선택하고 건설한 도읍이었다.
이후 두 사람의 갈등이 표면화된 적은 없다. 젊어서 용장에 덕장이었고, 장년에 혁명가가 되어 조선 왕업을 창시한 태조 이성계는 1408년 74세의 일기로 파란곡절한 삶을 마감했다.
함흥차사 이야기가 들어 있는 책 이중환의 <택리지>>는 현장답사 지리서이다. 이것은 태조가 죽고 나서 340년 뒤에 쓰인 책이다. 다음으로 이유원의 <<임하일기>>는 일종의 ‘잡록집’이며 태조가 죽고 나서 470년 뒤인 고종 때 쓰인 책이다.
나는 정사(正史) 신봉주의자는 아니다. 그렇다고 야사를 신뢰하는 것도 아니다. 출전이 어떻든지 간에 역사는 합리적인 것을 선택해야 한다. 함흥차사 이야기는 유언비어에 불과하다. 오늘의 한국인은 조선에 대해 무지하다. 조선인을 비정상적으로 폄하하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 식민사관과 유물사관 탓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