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일수록 오늘의 잘못된 정치를 말할 때, “지금이 뭐 왕조시대도 아니고”라는 말을 주워섬긴다. 이 말에는 ‘왕조시대의 정치는 미개했다’는 전제가 들어 있는데, 과연 그런 것일까?
우리가 알듯이 조선시대 사초의 기술은 사관(史官)이 맡아서 했다. 사관은 최고 권력자 군왕의 언행을 낱낱이 기록한다. 이를 위해 사관은 시쳇말로 해서 군왕을 ‘밀착마크’했다. 따라서 왕이 때때로 사관을 경원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401년 태종 1년 4월 25일의 일이다. 왕이 보평전(報平殿)에서 정사(政事)를 보았다. 사관(史官) 홍여강(洪汝剛)이 뜰아래[階下]에 들어오니, 환관(宦官)이 부축하여 내보내었다. 왕이 도승지 박석명(朴錫命)에게 명하였다.
“무일전(無逸殿) 같은 곳에서는 사관이 마땅히 좌우(左右)에 들어와야 하지마는, 이곳은 내가 편안히 쉬는 곳이고, 승지(承旨)들이 모두 사관의 직책을 겸하였으니, 사관이 반드시 들어올 것이 없다.”
태종은 공식 업무장소인 정전에 사관이 들어오는 것은 당연하지만 평상시 업무장소인 편전에까지 사관이 ‘반드시 들어올 것이 없다’고 했다. 나는 <조선왕조실록>을 읽다가 이 부분, ‘반드시 들어올 것이 없다’라는 말에 유의했다. 이것은 전면부정이 아니라 조건부정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3일 후에 다시 불거진다.
(왕이) 편전(便殿)에서 정사(政事)를 들었다. 사관(史官) 민인생(閔麟生)이 들어오려고 하므로, 박석명(朴錫命)이 말리면서 말하기를, “어제 홍여강(洪汝剛)이 섬돌 아래[階下] 들어왔었는데, 주상께서 말씀하시기를, ‘무일전(無逸殿) 같은 곳이면 사관이 마땅히 좌우에 들어와야 하지마는, 편전에는 들어오지 말라.’고 하시었다.” 하였다.
(민)인생이 일찍이 전지(傳旨)가 없었으므로 마침내 뜰[庭]로 들어왔다. 임금이 그를 보고 말하기를,
“사관이 어찌 들어왔는가?” 하니,
인생이 대답하기를,
“전일에 문하부(門下府)에서 사관이 좌우에 입시하기를 청하여 윤허하시었습니다. 신이 그 때문에 들어왔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편전에는 들어오지 말라.” 하니,
인생이 말하기를,
“비록 편전이라 하더라도, 대신이 일을 아뢰는 것과 경연(經筵)에서 강론하는 것을 신 등이 만일 들어오지 못한다면 어떻게 갖추어 기록하겠습니까?”하였다.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곳은 내가 편안히 쉬는 곳이니, 들어오지 않는 것이 가하다.”하고, 또 인생에게 말하기를,
“사필(史筆)은 곧게 써야 한다. 비록 대궐[殿] 밖에 있더라도 어찌 내 말을 듣지 못하겠는가?” 하니,
인생이 대답하였다.
“신이 만일 곧게 쓰지 않는다면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
태종은 자기의 말에 정면으로 논박하는 사관 민인생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임금이 웃으면서 말했다’는 문구와, “사필은 곧게 써야 한다”는 태종의 추가 발언에 유의했다. 앞에서는 사관에게 들어오지 말라고 했으면서 ‘사필은 곧게 써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의 이런 의문은 이로부터 약 2년 후인 1403년 3월 27일에 풀리게 된다. 태종은 이날 부로 사관의 편전 입시를 허용했기 때문이다.
‘(왕이)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왕은 말하기를) "지난번에 두세 종친(宗親)과 더불어 청화정(淸和亭)에서 과녁을 쏘았는데, 간원(諫院)에서 상소하여 말하기를, ‘날마다 무신(武臣)과 더불어 과녁을 쏜다.’ 하였으니, 종친이 들으면 어찌 마음에 불쾌함이 없겠는가? 그렇게 되면 문무(文武) 사이에 혐의와 틈이 생길 것이다. 내가 이러한 뜻으로 인하여 사관의 입시를 금한 것이다. 이것은 유생(儒生)을 무마하고 혐의와 틈을 방지하자는 것이지, 사관을 꺼려서가 아니다."
다시 약 1년 후인 1404년 2월 8일의 사건이 참 흥미롭다.
<태종실록> 4년 2월 8일 자에는 ‘임금이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졌으나 사관에게 알리지 못하게 하다’는 제목이 붙어 있다.
(왕이)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상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관(史官)이 알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태종을 밀착마크하던 사관은 말달리는 왕이 말에서 어떻게 떨어지는지를 지켜보았으며, 그가 사후에 어떤 말을 했는지도 다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왕이 ‘사관이 알게 하지 말라’는 말을 했다는 것까지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그전에 태종은 “사필은 곧게 써야 한다”고 이른 적이 있다. 이것은 조금 신비롭기까지 한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