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1418년 조선의 제4대 임금으로 즉위한 세종은 역대 제왕들 가운데 역사적으로 독보적인 지위를 누리는 인물이다. 명군으로 일컬어지는 다른 왕들, 예컨대 고구려의 광개토왕, 백제의 근초고왕, 신라의 태종무열왕, 고려의 문종, 조선의 정조 등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일세를 풍미한 군주로서 자신들의 왕조와 백성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들이 세운 업적이 현대 한국인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없다. 그들의 업적은 한국사의 명맥을 이어주고 그 내용을 풍부하게 해 준 ‘지난날의 유산’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세종은 다르다.“
- 이상 <<민음한국사>> 조선 01, 100쪽
이 글의 주장대로 세종은 오늘의 한국인에게 초역사적인 위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세종 말고도 하나 더 이순신이 있다. 이 두 인물은 오늘날 모든 한국인의 추앙을 받는다. 심지어 식민사관주의자들도 이 두 인물의 위대함을 인정하는 데 인색하지 않다.
그러나 식민사관이란 너무도 치밀하고 집요해서 긍정적인 인물을 말하는 데에도 교묘한 왜곡과 허구가 개입한다. 나는 이들 중에서 가장 많은 폐해를 주어온 것이 박종화(세종대왕)와 이광수(이순신) 유의 식민지시대 역사소설이며, 오늘날 대부분의 텔레비전 사극들도 이런 식민지시대 역사소설들의 관점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이것들은 사실적인 고증보다 다수 대중의 기호에 초점을 맞추어 사실과 상상력의 균형을 상실한 기형적인 역사물들이다. 이것들은 정작 주인공인 세종이나 이순신보다는 주변인물, 즉 다수 조선인의 부정적 면모를 과장한다. 그리하여 조선과 조선인은 세종이나 이순신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시기질투밖에는 하지 못하는 존재로 부각된다.
또한 세종이나 이순신은 조선이라는 체제 속 인물이 아니라 마치 조선 밖에서 홀연히 나타난 유별난 비조선인 것처럼 서술된다. 당연히 이런 시각은 세종의 시대와 임진왜란의 시대를 역사적으로 인식하는 데 어려움을 준다.
그러나 세종과 이순신은 그들의 부모, 자식들과 마찬가지로 조선이라는 체제 속에서 자기들에게 부하된 몫을 (출중하게) 감당한 조선인이었다. 그들은 그들에게 반기를 든 최만리, 원균과 함께 모두가 조선인이었다. 그들은 결코 조선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살다가 간 사람이 아니었다.
“조선왕조는 최절정기에 가장 위대한 임금을 얻는 기쁨을 누렸다. 이성계의 첫 부인에게서 난 다섯째 아들, 호전적인 방원은 다른 방면에서도 재주가 결코 모자라지 않았다....(그리고) 그의 세 번째 아들은 기막히게 놀라운 존재였다. 그는 재능 있는 학생이자 위대한 심성을 지닌 인물이었다. 방원은 22세의 이 아들에게 기꺼이 왕좌를 물려주었고, 세종(世宗, 재위 1418~50) 이라는 칭호를 받은 그는 한국의 현군이 되었다.”(브루스 커밍스 <<한국현대사>>, 89쪽)
우리는 세종을 생각할 때 한글 창제를 비롯하여 학문, 과학, 예술 등의 진흥을 먼저 떠올린다. 물론 세종은 이 방면에서 빛나는 공적을 남겼다. 그러나 세종은 아버지 태종과 함께 조선이라는 국가공동체를 확고히 다지는 일을 더 중시했다. 태종의 쓰시마정벌과 세종의 4군6진 개척이 바로 그것이었다.
세종은 아버지가 확립한 중화사대를 견지하면서 유학정신을 철저히 실천한 군주였다. 최대치로 발현된 그의 민본애민 역시 유학적 실천의 소산임을 의도적으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현대 한국인의 커다란 자부심의 근거가 되고 있는 한글 창제 역시 성리학 프로젝트의 일부였다. 세종은 어떤 왕보다도 성리학에 심취한 군주였다.
“선현의 지혜를 신뢰했던 세종은 우선 유학의 경전과 사서를 뒤져 이상적인 제도를 연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골격만 갖춰진 제도를 세부사항까지 규정해나갔다. 작은 법규를 하나 만들 때에도, 그 제도에 대한 역사를 고찰하고 각각의 장단점을 분석한 뒤 그 단점을 보완하는 방안, 다른 제도와의 관련성, 현재의 상황을 고려했다. 세종은 중국의 대표적인 역사서인 <<자치통감>> 완질을 구해 읽고 학자들을 동원해 이에 대한 주석서인 <자치통감훈의>를 편찬했는데, 이 주해본은 중국에서 간행된 것보다 완성도가 더 높다는 평을 들었다.”(역사저술가 윤희진)
세종뿐 아니라 이순신 역시 가장 조선적이고 유학적인 인물이었다. 이것은 조선 조정에 반기를 든 전봉준 역시 다르지 않다. 전봉준은 언제나 자기가 스스로 유학자임을 자부했다. 긍정적이고 위대한 인물을 조선과 유학에서 떼어 놓고 보려는 것은 비역사적인 태도이다. 이제 우리는 이런 태도에 우리가 거부해마지 않는 식민사관의 은폐된 음모가 근저하고 있음을 헤아려보는 안목을 가질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