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위에 사람 없다. 그것이 제 인생이에요”

두레농원 이경자 씨
[2020년 9월 4일 / 제284호]
유환희 기자l승인2020.09.04l수정2020.09.04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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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영암에살다
지난해 영암군이 여성친화도시로 지정됐다. ‘여성의 성장과 안전, 행복이 보장되는 곳’이라는 뜻의 여성친화도시. 영암 속에서 치열하고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을 만나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슬펐던 그녀들의 인생이야기를 들어본다.

지난 99년, 영암에 내려와 도포면에서 배 농장을 운영하고 있는 농사꾼 이경자 씨를 만났다. 이경자 씨는 한 때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해 앞장 서 싸우던 노동운동가라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아버지께서 노동운동을 하셨어요. 당시 나주비료화학이라는 곳에 근무하셨는데 노조사무국장으로 활동하셨죠. 어느 날 학교를 다녀오던 길에 수갑을 차고 경찰에 연행되는 아버지를 보게 됐죠. 아버지는 평소 박정희의 독재와 회사의 부당함에 아주 강하게 맞서시던 분이었어요. 후에 여러 가지 이유로 회사에서 쫓겨나시는 바람에 경제적으로 크게 어려워져 저도 대학을 포기하고 바로 취업해야 했지만 아버지의 그런 모습 덕분에 저도 노동운동을 시작할 수 있었어요. 물론 대학을 갔더라도 학생운동을 했을 테지만요”

20살의 나이에 로케트전기에 입사한 이경자씨는 회사의 부당한 대우에 참지 않고 항상 대항했다. 그런 그녀를 눈여겨 본 선배들은 노조의 큰 몫을 해낼 인재로 점찍었다.

“일이 끝나면 선배들이 음악다방도 데려가고, 주점도 데려가고 했어요. 쉽게 말해 노조활동을 하게 하려고 꼬시는 거죠. 그렇게 어울리며 친해지다 보니 자연스레 노조활동을 하게 됐죠. 그 후 여러 직책을 맡으며 노조활동을 하던 중 27살에 노조위원장을 맡게 됐어요. 중책이다 보니 어깨는 무거웠지만 피 끓는 나이에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우리 노동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제 임무였으니까요”

10여 년이 넘는 시간을 노조운동에만 매달려 있는 그녀에게 한 지인이 만남을 권유했다. 오랜 고민 끝에 처음 만난 남편, 큰 키에 사람얼굴만 한 주먹이 유독 눈에 띄었다. 남편은 첫 만남에서 영암에서 배 농사를 지으며 농민회에 가입해 농민운동을 펼치고 있다고 본인을 소개했다. 

“노동운동을 하다보면 물리적인 충돌이 당연히 발생하죠. 여자의 몸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일도 생기고요. 남편을 처음 만났는데 큰 덩치에 바위 같은 주먹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아! 이 사람이랑 함께라면 어디 가서 맞지는 않겠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34세였으니 어린나이도 아닌데 참 단순했죠. ‘이제는 영암에 가서 농민운동을 해야겠다’ 생각했어요. 그렇게 남편을 따라 영암에 왔더니 웬걸요. 내성적인 성격 탓인지 그렇게 열심히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더라고요. 어쩌겠어요. 나라도 열심히 해야겠다 싶어 농민회 활동을 시작했죠”

그렇게 시작하게 된 농촌생활. 이상과 현실은 너무 달랐다. 굶진 않겠구나 생각했던 배 농사는 ‘아랫돌 빼 윗돌괴기’의 연속이었다.

“처음 영암에 올 때 배꽃 필 무렵이면 드레스 입고 꽃구경하면 되는 줄 알았어요. 말 그대로 헛꿈 꿨던 거죠. 배 꽃피면 그 때부터 온 몸이 부서져라 일해야 했어요. 그래도 이익은 얼마 안 남았어요.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에 충남까지 가서 영양제 만드는 방법을 공부했어요. 칡순도 써보고 깻묵도 써보고 흑설탕도 섞어보고 연구도 많이 했죠. 농사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니 이제 직거래를 해야겠구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배꽃축제를 시작하게 된거죠”

이경자씨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배꽃축제를 열기 시작했다. 지자체나 단체에서 개최하는 축제를 개인이 하기에는 당연히 큰 어려움들이 따랐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우리 농장의 직거래 루트를 만들기 위해서였지만 점차 많은 분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어요. 지난해까지 10년을 한 것 같네요. 처음에는 4~50명 수준이었던 축제가 300명이 넘는 큰 축제가 됐어요. 일이 너무 커진 거죠. 축제가 점점 커지다 보니 공연을 할 수 있는 영애원, 구림공고 학생들, 카페에서 노래하는 분들, 지역의 이름난 예술인들을 다 혼자서 섭외하고 기획하고. 또, 섭외한 분들이나 방문객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 돼지도 잡고 음료도 만들고 뷔페도 운영하고 하다 보니 몸이 남아나질 않더라고요. 코로나 때문에 멈춘 것도 있지만 사실 혼자서 하는 데에 한계를 느꼈어요. 이제는 마을주도형 축제를 생각해보고 있어요. 우리 도포면의 농가들이 힘을 모아 할 수 있는 축제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이경자 씨는 ‘사람위에 사람 없다’는 마음가짐이 노동운동가 아버지와 본인의 노조활동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산물이라고 했다. 농장에 인부로 오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도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이경자씨는 날카로운 비판도 잊지 않았다.

“지금 우리 농촌은 외국인 노동자들 없이는 인력을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죠. 하지만, 이들 외국인 노동자들을 너무 함부로 대하는 경향이 짙어요. 우리 선조들이 외국에 나가 당했던 설움을 생각해야죠. 아니 그것을 차치하더라도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데에 당연히 지켜야 할 기본 예의가 있어야죠. 우리 스스로 각성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호탕한 웃음과 당당한 목소리, 굳게 선 신념으로 당당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경자 씨. 진한 사람냄새와 자연의 향이 묻어나는 그녀의 모습이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유환희 기자  news@woori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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