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장의 재미있는 역사이야기]

[2024년05월03일 / 제462호] 영암우리신문l승인2024.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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뮬란

1998년 개봉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뮬란>은 훈족(흉노)의 침공을 받은 중국에 징집령이 내려지자 여성 주인공인 ‘뮬란’이 연로한 아버지를 대신해 종군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이다. 여성의 행동양식과 사회적 참여가 엄격히 제한되었던 전근대임에도 여성이 한 명의 당당한 군인으로 성장해 나라를 구한다는 <뮬란>의 작품성은 호평을 받았고 지금까지 디즈니 명작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디즈니의 뮬란’은 실제로 중국 문학작품에서 영감을 얻었다. 뮬란은 북위 시대 여성 무장의 이야기를 담은 장편서사시 <목란사(木蘭辭)>의 주인공 ‘화목란’의 이야기에서 착안한 것이다. 화목란의 실존여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오랜 세월 전승을 거듭하며 민간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고 오늘날까지 2차 창작물로 재탄생하며 명맥을 잇고 있다. <뮬란>은 디즈니 측이 제작한 또 하나의 <목란사> 판본인 셈이다.

 

‘가한’과 ‘천자’

재미를 추구하는 애니메이션에서 굳이 엄격한 역사적 고증의 잣대를 들이댈 필요는 없지만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면 본작에서 새롭게 보일 요소들이 몇 가지 있다.

<뮬란>과 <목란사>에서는 황제가 전쟁을 위해 징집령을 내리는 내용이 공통적으로 나온다. 이때 명령을 내리는 주체, 즉 군주의 명칭이 각기 다르게 표기되는데, <뮬란>에서는 ‘황제(emperor)'라고 하는 반면 <목란사>에서는 ‘가한(可汗)’이라고 나온다.

‘가한(可汗)’은 중국의 북방, 즉 유목과 수렵·약탈로 생계를 잇는 북방민족의 군주를 칭하는 호칭으로 ‘카간(qaghan)’으로도 불린다. 돌궐의 묵철가한이나 몽골의 칭기스칸도 여기서 유래했으며 당 태종은 자신에게 복속한 여러 이민족들로부터 ‘천가한(天可汗)’으로 추존된 바 있다. 만주족이 부른 ‘한(汗)’이란 이름도 가한과 같은 의미였다. 이처럼 가한은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북방민족 집단에서 통용돼왔던 용어였다. 그렇다면 화목란이 ‘가한’이라 칭한 북위의 군주도 중국의 황제일지언정 북방민족의 역사와 정체성에서 예외일 수 없다.

북위는 중국사에 포함돼나 한족(漢族)의 나라는 아니었다. 이들 지배층을 구성한 것은 선비족(鮮卑族)이었다. 선비족은 고대부터 중국의 동북에서 몽골고원에 이르기까지 분포한 유목민으로 중국은 물론 부여·고구려를 유린하며 치욕을 안겨주는 등 동북아 역사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4세기부터 진나라(서진)를 침략해 5호16국의 혼란기를 주도했던 세력 중 하나로 이들에 의해 서진은 중원을 상실하고 장강 이남으로 남하한다. 한족 정권이 사라진 무주지의 점유를 놓고 벌인 투쟁에서 승리한 북위는 북중국을 통일하고 장강 이남의 한족 왕조와 남북으로 대치하는 남북조 시대를 형성했다.

한편 <목란사>의 말미에는 ‘천자’도 언급된다. 가한이 유목민 군주라면 천자는 고대 주나라 이래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한 군주의 칭호였다. 농경세계로 편입한 북위는 이제 인구수에서 압도적인 한족과 통혼하고 제도와 문물·언어 등 그들이 구축한 체제를 수용하는 등 공존하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가한과 천자가 황제의 칭호로 모두 사용될 수 있었던 북위 시대는 한족과 북방민족 양자 간 융화가 진행되던 복합적인 과도기인 셈이다. 작중 오합지졸 취급받던 뮬란과 그녀의 전우들이 전사로 성장한 데에는 용맹한 유목민 정체성이 각성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유목민 vs 유목민 전쟁

2020년 디즈니는 <뮬란>을 실사영화로 제작했으나 이번엔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논란에 시달리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애니메이션보다 실사영화에서 개선된 한 가지가 있었는데 작중 북위의 적대 세력을 ‘훈족(Huns)’이 아닌 ‘Rouran’, 즉 ‘유연족(柔然族)’이라 정확히 명명한 것이다. 화목란의 실존여부는 알 수 없으나 <목란사>의 이야기는 북위와 유연의 대립이라는 역사적 사실 속에서 탄생한 작품이었다.

유연은 선비족이 남하하고 비어있는 몽골고원을 장악해 새롭게 떠오르는 유목민 세력이었다. 왕족 간의 골육상전으로 쇠퇴를 거듭하며 북방 세력을 제어하지 못했던 서진과 달리 북위는 유연을 상대로 수차례 정벌을 단행해 약화시킴으로써 북방의 안정을 도모했다.

선진문명을 구축한 중국과 포악무도한 유목민의 선악 대립구도를 보여주는 <뮬란>의 전쟁 이야기에는 이처럼 보다 복잡한 역사적 맥락이 숨어있었다. 어쩌면 뮬란은 영화에서처럼 정의로운 국가의 수호자가 아닌 침략군의 일원으로 종군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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