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중국답사기]유학(儒學)에게 길을 묻다-⑧

영암읍 새실길 김기중
[2023년 12월 29일 / 제445호]
영암우리신문l승인2023.12.29l수정2024.01.04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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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흥(嘉興) 가는 길

11월 3일(금) 중국 답사 마지막 날은 가흥(嘉興) 행으로 시작되었다. 항주에서 가흥까지는 버스로 약 1시간 30분, 역시 강 회장님의 명강의 덕분인지, 소요시간이 훨씬 더 짧게 느껴졌다. 가흥은 항주와 상해 중간에 위치한 도시로서, 우리에게는 백범 김구 선생의 피난처로 잘 알려져 있다.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紅口)공원(현 루쉰공원)에서의 윤봉길 의사의 거사를 자신이 꾸민 일이라고 내외에 알린 김구에게 현상금 60만 위안이 내걸린다. 그 어디에도 안전한 곳이 없었던 위급했던 상황에서, 당시 상하이 항일구원회 회장이자 상하이 법과대학 학장이던 저보성(褚補成)은 김구와 임시정부의 피난처로 가흥에 있는 자신의 집 매만가(梅灣街) 76호와 일휘교(日暉橋)를 흔쾌히 제공했다. 그는 왜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 김구 일행을 적극적으로 엄호했을까? 아마도 윤봉길 의사의 쾌거를 통하여 일제야말로 두 나라 공동의 적(敵)이고, 따라서 함께 단결해야 일제를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강 회장님의 강의를 들으며 이런저런 상념에 젖는 동안 버스는 어느새 남호(南湖) 광장에 도착했다.

어머니의 호수, 남호(南湖)

항주(항저우)에 서호가 있다면 가흥(자싱)에는 남호(南湖)가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시원스럽게 펼쳐진 호수가 여행객의 가슴을 적셔준다. 대운하로 연결된 항주에서 베이징까지의 장구한 물길마다 크고 작은 호수들이 많다지만, 남호와의 첫 대면은 무언가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늦가을 오전 10시의 남호에는 서너 척의 유람선과 나룻배들이 반짝이는 윤슬 위에서 우리를 반겨주고 있었다. 저 나룻배를 타고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고단한 도피생활을 이어갔을 백범 김구, 그는 상해를 탈출하여 낯선 땅 가흥에 온 첫인상을 ‘백범일지’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가흥에는 산이 없으나 호수가 낙지발같이 사방으로 통하여, 7~8세 어린아이라도 다 노를 저을 줄 알았다. 토지는 극히 비옥하여 각종 물산이 풍부하며 인심과 풍속이 상해와는 딴 세상이었다.” 그가 허구적인 이론이나 맹목적인 이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로지 고통받는 민중의 완전한 자주독립만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어머니와 같은 가흥 남호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신실(信實)한 두 친구, 저보성(褚補成)과 주애보(朱愛寶)가 있었다.

매만가(梅灣街) 76호

가흥시 남문 매만가 76호는 저보성의 수양 아들 진동생(陳桐生)의 주택으로 청나라 말기 중화민국 초기에 지어졌다고 한다. 나무와 벽돌로 이루어진 복도식 6칸 양식의 2층짜리 건물로 남쪽에는 서남호가 있었다. 1932년 5월부터 2년여 동안 김구는 저보성의 지원으로 호수 옆 남향집에서 기거하였다고 한다. 가흥시 정부에서는 2000년 김구 피난처를 ‘시급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하였고, 2005년에는 200여만 위안을 투자하여 김구 피난처를 전면 수리 복원하였으며, 절강성 ‘성급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하였다. 또한, ‘김구 피난처’와 함께 매만가 76호에는 ‘저보성 사료진열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김구와 저보성, 세 살 터울로 동시대를 살아간 이 두 사람이 공동 항일투쟁을 전개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한중 양국의 깊은 우의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처녀 뱃사공, 주애보(朱愛寶)

“그는 그놈이 주애보(아이빠오)의 뺨을 때리는 소리를 들었으며, 또한 그녀의 시원스러운 대답을 들었다. 선실에는 그녀의 남편이 누워 있다고 말하는 것을. 그녀의 남편! 그녀는 놀라운 용기와 지혜로써 그 흉악하기 그지없는 놈들을 물리쳤다. 그녀는 그의 어머님처럼 훌륭한 여인이었다!” 1999년에 출간된 중국 작가 하련생(夏輦生)의 소설 선월(船月)의 한 대목이다. 당시 배 안을 수색하던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순간에 주애보가 기지를 발휘하여 김구를 구하는 장면이다.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그저 광동 상인 장씨 아저씨로만 알고 있었던, 60대 노인에게 보여준 처녀 뱃사공의 용기와 헌신은 어디서 나왔을까.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인간적으로 대해 준 김구의 성정(性情)이 아니었을까. 김구에게 주애보는 생명의 은인이자 어머니와 같은 특별한 존재였음은 백범일지의 ‘폭격 속의 남경생활’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왜구들이 자신의 암살대를 상해에서 남경으로 파견하여 공자묘 근처를 수색하자 이번에도 가흥에서 주애보가 건너와 신변을 보호해 주었다고 적고 있다. 그리하여 근 5년 동안, 모르는 사이, 부부같이(類似夫婦) 되었음에도 남경에서 다시 긴박하게 송별할 때 여비 100원밖에 주지 못한 심정을 유감천만(遺憾千萬)이라고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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