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운동 40주년]광주 5월, 시민들의 생명을 위해 산화한 군서 출신 故 문용동 전도사

계엄군의 만행을 목격 후 도청 폭약 관리하다 계엄군에 희생
사후 프락치로 누명…연구 결과 통해 문용동 전도사의 명예 재조명
[2020년 5월 15일 / 제269호]
장정안 기자l승인2020.05.15l수정2020.05.15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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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전두환과 신군부는 총부리를 광주시민에게 돌렸다. 비상 계엄을 반대하며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과 그들을 돕는 시민을 폭행하고 살해했다.

피바람이 몰아쳤던 역사의 한복판에는 목회자를 꿈꾸는 신학도들도 있었다. 당시 호남신학대학교 4학년에 재학하면서 상무대교회에서 시무를 맡아왔던 故 문용동 전도사도 그중 한명이었다.

故 문 전도사는 군서면 도장리에서 3남5녀 중 차남으로 집안은 비교적 부유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80년 5월 18일 상무대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광주 시내를 걷다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원들에게 폭행을 당해 쓰러진 시민을 기독병원으로 데리고 가 치료를 받게 했다. 만행을 저지른 계엄군은 오히려 광주시민을 불순분자로 몰아가며 폭력을 정당화했다. 문 전도사는 격분했다. 그리고 문 전도사는 5·18 항쟁에 뛰어 들었다.

아니, 4·19혁명에서부터 처참하리만큼 짓밟혔던 자신 신앙의 모토나 다름없던 인간애가 파괴되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었기에 5·18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는 표현이 더 맞았다.

문 전도사의 5월 22일 자 일기에 “계엄 당국의 엉터리없는 오도, 불순분자들의 난동이라니. 그럼 내가 나도 불순분자란 말인가. 대열의 최전방에서 외치고 막고 자제시키던 내가 적색분자란 말인가. 우린 후세에 전 국민에게 광주 사태가 몇몇의 불순 세력에 의해 자행된 것이 아니라 무자비한 공수부대의 만행에 분노한 선량한 시민들의 궐기임을 알리고 증언해야 하는 것이다”고 당시의 상황과 심경을 기록했다.

문 전도사가 시위에 참여한다는 사실이 교회에 알려지자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무슨 전도사가 데모를 하는가. 오히려 데모를 말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였다. 하지만 문 전도사는 “고통받는 민중을 위해 목사들이 앞장서야 한다”고 반문하며 민중이 고통을 받는 세상 속으로 몸을 던졌다.

문 전도사가 시민군에 합류해 맡은 임무는 시민을 구호하는 임무였다. 부상자를 돌보고 헌혈하는 일이었다. 그러던 중 정식적인 군사훈련을 받지 못한 시민들이 살상용 무기를 함부로 다루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수도방위사령부에서 헌병으로 군생활을 마친 문 전도사의 눈에는 위험 천만한 상황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애먼 시민들이 다치거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문전도사는 도청 지하에 있는 무기고를 관리를 자청했다. 

당시 무기고에는 총기류, TNT, 다이너마이트, 수류탄 등이 보관돼 있었다. 1977년 전북 이리(현 익산)역에서 발생한 폭발사건의 2배가 넘는 양이었다. 문 전도사와 함께 김영복 씨도 함께 했다. 김 씨는 공병대 하사관 출신 인물이었다.

문 전도사와 김씨는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총기와 다이너마이트 등을 철저하게 관리했다. 신원이 확실한 사람에게만 무기를 반출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무기를 내어주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하사관 시절 폭발사고로 부하를 잃었던 김영복씨가 사방에 놓여있는 수류탄과 타다이너마이트, TNT 등의 뇌관을 분리해 놔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는 생각 이었다. 

문 전도사도 동의했다. 그래서 1980년 5월 25일 뇌관분리 작업을 했다. 분리된 뇌관은 쌀뒤주에 보관했다.

뇌관 분리작업이 끝날 무렵 한발 물러나 있던 계엄군이 다시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퍼졌다. 그리고 27일 문 전도사는 도청에 쳐들어 온 계엄군의 총탄에 숨을 거뒀다. 사실 문 전도사는 목숨을 부지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할 경우 도청을 중심으로 반경 2~3㎞ 정도 파괴될 수 있다. 나는 신학도로서 주님의 종 양심으로 이 위험한 폭발물을 방치해 둔 채 도저히 떠날 수 없다”고 광주의 평화를 위해 희생을 선택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광주를 위해 희생한 문용동 전도사를 기리는 작업은 비교적 늦게 시작됐다. 안타깝게도 문씨는 사후 ‘군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쓰게 된다.

신군부는 문씨를 ‘군이 매수한 부화뇌동자’로, 배승일 기술문관을 ‘폭도로 가장해 침투시켰던 요원’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문씨는 시민사회에서도 “계엄군들이 정보요원들을 시켜 다이너마이트를 제거시켰다”며 공작요원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문씨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그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기념사업회 총무 도주명 목사는 “문용동 전도사는 폭탄 뇌관을 분리하며 폭약 뭉치를 분해해 광주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구했다. 폭약이 폭발하면 시민과 계엄군 모두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며 “이후에도 도청에 끝까지 남아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행동은 계엄군과 내통이라기보다 ‘시민을 위한 충정’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강조했다.

장정안 기자  news@woori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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