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칼럼]이순신은 지장(智將), 원균은 용장(勇將) - 함께 영웅으로 기억해야 마땅

[2020년 5월 15일 / 제269호] 영암우리신문l승인2020.05.15l수정2020.05.15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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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시사평론가
김갑수

임진왜란은 정유재란을 포함하여 7년 간에 걸친 전쟁이었다. 이 기간 동안 무수한 살육과 기아에 역병까지 돌아 그 참혹상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아 이 전쟁에서 조선은 국체를 수호했고 일본은 패주했다. 참고로 이 전쟁을 조선(북)에서는 ‘임진조국전쟁’이라고 부른다.

당연히 이 전쟁에는 수많은 장병의 활약과 의병들의 분투가 있었다. 초반 패전을 거듭한 육지와 달리 해전에서는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전했다. 이로써 일본군의 보급선을 끊었기 때문에 일본의 전쟁 지속 의지를 꺾을 수가 있었다.(물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이라는 우연적 요인도 작용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역사는, 이 전쟁은 이순신이라는 영웅 혼자서 치른 전쟁처럼 되어 있다. 숱한 영웅들의 활약과 병사들의 희생이 망각되었다. 일찍이 태종 때부터 제작한 거북선을 비롯한 우리의 조선(造船) 기술력과 수많은 조선 수병과 격군들의 우수성이 간과되기도 했다. 

이순신 하나만 또는 유성룡 포함 둘을 빼고는 조선인 모두를 ‘사심 있는 찌질이’로 만들어 버린 이 오도된 역사는 당시 전시 내각의 총책임자요, 집권당 동인과 남인의 영수였던 유성룡의 개인 문집 《징비록》에서 시작되었다. 이 책에 대하여는 유성룡에게 비교적 우호적으로 기술된 <수정선조실록>에서조차,

“일찍이 임진년의 일을 추기하여 이름 하기를 ‘징비록’이라 하였는데 세상에 유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식자들은 자기만 앞세우고 남의 공은 덮어버렸다 하여 이를 기롱했다.” 라고 혹평을 가했다.

《징비록》에서 가장 억울하게 매도된 인물은 우리가 ‘간신의 대명사’처럼 여겨온 원균이다. 유성룡은 자기가 천거하고 자기 세력인 동인과 남인에 줄을 대고 있었던 이순신에 대해서는 한없는 찬양을 늘어놓은 반면 자기와 반대편 진영에서 천거한 원균에 대해서는 부당한 모함을 서슴지 않았다.

“원균이 적군의 세력이 큰 것을 보고 싸울 생각은 안 하고 전선 100여 척과 화포, 병기 등을 물속에 가라앉히고 수군 만여 명을 무너뜨렸다.”(징비록)

일단 이 내용은 실제 사실과 크게 다르며 전혀 그럴듯하지도 않다. 개전 시 조선 전함은 총 100척 미만이었으며 수군 역시 다 합쳐 봐야 만 명에 턱없이 미치지 못했다. 그런데 100척의 우리 전함과 만 명의 우리 수군을 원균이 궤멸시키다니? 또한 원균은 당시 수군의 4분의 1만 관할하던 경상우수사였다. 경상좌수사가 따로 있었고 전라에도 좌, 우수사가 있었으며 이순신은 전라좌수사였다. 

게다가 원균이 전함과 무기를 물속에 가라앉혔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또한 마지막 ‘수군 만여 명을 무너뜨렸다’에서 무너뜨렸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원균은 성격이 음험하고 비뚤어졌는데 경향 각지에 관계를 가진 사람이 많았으니 이순신을 헐뜯는 데 온힘을 기울여서..."(징비록)

유성룡과 원균은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유성룡은 원균의 내부 성격까지 전지적 관점(사실은 자의적)으로 적어 놓았다. 실록에는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했다는 기록이 없다. 반면 《난중일기》에는 원균을 나쁘게 말하는 이순신의 기록이 여러 번 나타난다. 

또한 경향 각지에 관계를 가진 사람이 많았던 것은 원균이 아니라 오히려 이순신이었다. 이순신은 당대 문과 무의 실력자였던 유성룡, 권율 등과 정성껏 서신 교환을 했다. 

이런 비합리적인 기록은 《징비록》 전편을 통해 수십 건이나 발견된다. 지면상 《징비록》에 기록된 원균의 죽음에 대하여만 검토해 보기로 한다.

“적에 쫓기는데 신체가 비대하고 둔하여 소나무 밑에 앉아 좌우 부하들이 도주한 채 적에게 살해되었다. 어떤 이는 그가 적에게 죽었다고 하고, 또 어떤 이들은 그가 달아나서 살아남았다고 하지만 어느 쪽이 사실인지 알 수 없다."(징비록)

원균은 이순신이 기피해 온 해전(칠전량 해전)에 대신 나가 패하여 육지에 올라 최후까지 싸우다가 전사한 장군이다. 당시 그의 나이 58세였다. 그런데 유성룡은 원균의 신체까지 들먹이며  ‘비대하고 둔하여’라고 부적절하게 언급함으로써 그의 죽음을 최대한 비루한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당시 선전관이었던 김식이 올린 칠전량 해전 보고서 <정유년 장계>에는 “원균은 왜구 6,7명과 싸우다 최후를 맞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선조실록>에는 원균의 죽음이 더욱 ‘분연한 전사’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알듯이 임진왜란 때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조선 수군이 초전에서 연거푸 승리를 일궈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놀라운 사실이 은폐되어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전체 해전 수는 총 22전으로 정리될 수 있는데 이 중 17전이 원균과 이순신이 공동으로 치른 전투였다는 사실이다. 또한 17건의 전투 중 16건이 원균 관할 구역인 경상우수영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원균은 이순신보다 5세 연상이고 무과에는 10년 먼저 등과한 선배였다. 이순신보다 가문이 좋고 무과 급제 성적도 우수했다(원균은 차석, 이순신은 13등). 일찍이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세운 공로도 혁혁하다. 이순신도 여진족과의 전투에 참전했는데 지휘 실수로 문책을 받아 백의종군했던 적이 있었다.

원균은 이순신과의 갈등으로 인해 경상우수사에서 충청병마사로 전보 조치되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상당산성은 원균이 충청병마사 시절 초막을 짓고 살며 지휘, 축조한 산성이다. 하지만 오늘날 상당산성 어디에도 원균의 이름은 없다. 이후 원균은 이몽학의 난이 발발하자 진압 전투에 가담했다. 

원균은 나라가 호출할 때 물불 가리지 않고 나가 전투로써만 말하던 용장이었다.

그는 조정의 지시가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국명을 거역할 수가 없어 최후의 전투에 나갔다가 패전하여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한 장군이다. 전후 조선 조정이 왜 그를 이순신과 함께 전쟁의 1등 공신으로 추서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순신이 탁월한 장군이었다는 것은 자타가 인정하는 바라서 이 글에서는 언급을 생략했다. 다만 우리는 그동안 조선 역사를 정사인 실록을 외면한 채 식민사학자들이 권장하는 문집 등으로만 파악해 왔다. 이제는 심하게 왜곡되어 전래되어온 야사 위주의 조선역사를 바로잡을 때가 되었다. 이순신은 지장이었고 원균은 용장이었다. 그리고 이 두 분은 공히 국난의 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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