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영암에살다
지난해 영암군이 여성친화도시로 지정됐다. ‘여성의 성장과 안전, 행복이 보장되는 곳’이라는 뜻의 여성친화도시. 영암 속에서 치열하고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을 만나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슬펐던 그녀들의 인생이야기를 들어본다.

고작 10개월, 아정 정현숙 화가가 소아마비라는 괴물을 만나기 전까지의 시간이다.
아픈 몸을 이끌고 전국에서 인정받는 문인화가가 되기까지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견뎌온 정현숙 화가를 만났다.

돌도 되기 전 앓았던 소아마비로 하반신 장애를 안고 있는 정현숙 화가는 우리나라에서 ‘장애’를 가진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데에 가장 큰 장애물은 ‘선입견’이라고 못 박았다.

“지금 우리나라는 여러모로 많이 좋아졌죠? 내가 커 온 우리나라는 여성에 대한 제약과 장애인에 대한 선입견으로 꽉 막혀 있는 사회였어요. 여자가, 그것도 장애인이 한 분야에서 이름을 알리고 인정받기까지 얼마나 힘들고 고독한 시간이었는지 누구도 쉽게 공감 못 할 거예요”

스물 아홉, 비교적 어린나이에 국전에 입상한 정현숙 화가는 20살이 되던 해, 처음 붓을 잡았다. 

“시골에 외진 곳에 있다 보니 심심해서 시작했죠. 근처에 책방도 없는데다 길마저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여서 읍내 한 번 나가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어느 날 광주에서 미술을 전공하던 사촌오빠가 고향집을 찾아 왔는데 옆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걸 보자니 재밌어 보이더라구요. 흥미가 생겨 몇 번 그리다보니 너무 좋은거에요. 그 길로 광주 친척집에 올라가 살며 오빠한테 그림을 배웠어요”

전문적으로 배워야겠다고 생각 한 정 화가는 일주일에 한 번 씩 서울을 왕복하며 ‘계정 민이식 선생’ 밑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공부를 계속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려서부터 같이 자라 지금도 티격태격하는 사촌 남동생의 도움이 컸다며 내심 고마움을 내비쳤다.

“지금도 내 곁을 지키고 있는 사촌동생의 도움이 컸어요. 날이 덥든 춥든 엘리베이터도 없는 4층 건물을 날 업고 오르내렸어요. 우리 둘 다 젊은 나이니까 가능했다는 생각도 들지만 동생이 아니었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죠”

장애인을 위한 인프라가 부족했던 시절 학교를 다니기 힘들어 초등학교만 졸업한 정 화가는 서른이 넘어서야 중등·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패스하고 방송통신대에서 국문학을 배웠다.

“여기저기 입상하면서부터 내 이력을 작성해야 되는데 모두 학력란이 있는거예요. 참 스트레스더라고요. 길게 공부하기 싫어서 3개월, 8개월 바짝 공부해서 둘 다 후딱 패스했죠. 주위에서는 당연히 미대를 가겠거니 했다는데 이동에 제약이 있다 보니 방송통신대를 선택했어요”

‘돈이 되지 않는 문인화’라고 얘기하는 정 화가는 지역의 예술계에 대한 인식변화가 필요하다고 얘기했다.

“예전에는 혼수로 병풍을 많이 했다보니 그나마 돈벌이가 되던 시절도 있었다지만 지금은 전혀 그런 문화가 없죠. 그렇다고 전시회나 갤러리를 찾아 작품을 구매하는 경우도 극히 드물어요. 이런 경향은 작은 시골일수록 더 심하죠. 그렇다보니 지역에서 살아가는 문화예술가들은 경제적으로 굉장히 힘든 상황이에요. 나주처럼 분야마다 협회를 만들어 지원해 준다면 지역 출신으로 지역을 대표하는 예술가들이 많이 나올 텐데 아쉬운 부분이죠”

하지만 지역이 원한다면 일선에 나와 예술혼을 펼치고 싶다고도 했다.

“전국단위 미술대전에서는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는데 지역에서는 잘 나서지 못하고 있어요. 장애인이라 활동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는지 섭외하기를 조금 어려워하는 부분이 있죠. 하지만 나는 지역이 원한다면 전면에 나서서 활동하고 싶어요. 문인화가로서, 또 한명의 예술가로서 지역의 문화예술이 한 층 더 발전할 수 있다면 언제라도 환영이에요”

몸이 아팠을 때 이미 인생의 굴곡은 끝났다는 정현숙 화가는 본인의 작품이 어딘 가에라도 남는다면, 누군가에게라도 기억 된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한다.

“내가 죽더라도 내 작품은 남아 있겠죠. 그게 누구든, 어디든 상관없어요. 단지 ‘그림을 사랑했던 그림쟁이였구나’ 기억 된다면 그걸로 된 거죠. 내 삶을 돌아보면 ‘두 발로 서 살아온 사람보다 더 멋지게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앞으로도 이렇게 멋지게 살아야죠”

여성으로서, 또 장애인으로서 성공하기 힘든 예술계에 우뚝 선 정현숙 화가를 지역 문화예술계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날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