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영암에살다
지난해 영암군이 여성친화도시로 지정됐다. ‘여성의 성장과 안전, 행복이 보장되는 곳’이라는 뜻의 여성친화도시. 영암 속에서 치열하고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을 만나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슬펐던 그녀들의 인생이야기를 들어본다.

고향 서울 떠나 영암에 터 잡은 지 30년, 이제는 누가 봐도 영암사람인 반디논술의 정미숙 원장을 만났다.

성신여대 국어국문과를 나와 서울의 한 잡지사에서 취재기자로 근무했다는 정미숙 원장은 어려운 형편을 딛고 자수성가한 부모님 덕에 가난과는 거리가 있는 학창시절을 보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영향으로 책과 가깝게 지냈다는 정 원장은 평생을 책과 함께 하고 있다.

“방학이면 아버지께서 책장의 책들을 싹 비우고 다른 책들로 세팅을 해주셨어요. 다 고가의 책들이었죠. 책장을 다 채우시고는 ‘이번 방학에는 여기까지 읽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했죠. 그때는 그다지 넉넉지 못한 시절이었지만 당연하다 생각했어요.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인데 지방에서 교사로 있는 친구 분에게 부탁해 시골까지 내려가 헌책 값을 치르고 가져 오신 어렵게 구한 책이었어요”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정 원장은 ‘고향으로 돌아가 농민을 위한 활동을 하고 싶다’는 남편의 손을 잡고 영암에 첫 발을 내딛었다. 친정 부모님은 애지중지하던 둘째딸의 날벼락 같은 선언에도 그녀의 의견을 존중했다.

“크게 반대는 안하셨어요. 그저 우리 부부의 손을 꼭 잡으시고서 ‘너희가 가장 잘 될 것 같다’고 하셨죠. 그 말 한마디에 모든 게 담겨있었죠. 지금도 친정에 가면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손을 꼭 쥐시고는 손바닥을 만지세요. 내 딸 손에 굳은살이 있나 없나 보시는 거죠. 아버지의 말 한마디에 느껴졌던 ‘내가 잘못 되면 안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지금까지 절 지탱해준 힘인 것 같아요”

오히려 시부모님의 반대가 컸다.

“처음 영암에 내려와 살겠다는 우리 부부를 보고 시부모님이 많이 가슴 아파 하셨어요. 시골에서 어렵게 키워 소위 명문대라는 학교에 보낸 아들이 서울에서 남부럽지 않게 자리 잡았으면 하는 마음이셨을 테죠. 허락은 하겠지만 같이 살기는 힘들다는 말씀에 어쩔 수 없이 따로 나와 살게 됐죠”

부부는 영암읍보다 나주가 더 가까운 곳에 논을 빌려 어렵사리 살림집을 마련하고 남편의 지인으로부터 얻은 씨돼지 한 마리로 양돈을 시작했다. 곱게 자란 서울새댁은 그렇게 가난을 마주했다.

“처음 겪는 가난이 무섭지는 않았어요. 젊으니까. 하지만 계속되는 가난에 나도 점점 지치더라구요. 어느 날, 임신한 몸으로 시장을 다녀오는 버스에서 지팡이를 짚은 어르신들이 사료포대를 들고 타시는 모습을 보며 정말 울화통이 터졌어요. 저게 뭐라고 저렇게 힘들게 이고지고 다니시나. 그 모습에서 내 삶이 투영된거죠”

그 무렵부터 진짜 영암사람이 된 것 같다는 정 원장은 양돈장의 냄새에 불만 가득한 주변농가들과 밑바닥까지 떨어지는 돼지 시세에 결국 5년간의 양돈을 접었다.

이후, 취재기자 경력을 살려 방송심의위원회에서 방송모니터링 요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정 원장에게 맞는 옷은 아니었다.

“방송을 모니터링하면서 잘못된 부분을 찾아 법적근거에 따라 시정을 요구하는 일이었어요. 실적도 괜찮아서 꽤 인정받으며 근무 했었어요. 어느 순간 나를 보니 항상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사물을 대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아차 싶었어요. 바로 일을 그만두고 아이들과 어울리며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했죠”

벌써 21년 째 아이들에게 논술을 가르치고 있는 정미숙 원장은 도서관과 복지시설에 재능기부도 이어오고 있다.

정 원장은 나이가 들어도 계속 할 수 있는 봉사활동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하고 싶은 봉사가 많아요. 영암은 책에 투자하기를 꺼려하는 성향이 짙은데 이런 분위기를 전환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지역 학생들의 진로설정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멘토링이나 어린아이들의 구연동화처럼 어르신들을 위한 판소리를 접목한 북텔링 등 영암의 모든 사람이 책과 가까워 질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어느덧 영암을 사랑하는 영암사람이 된 정 원장은 본인의 방식대로 살아 온 자신의 삶이 ‘재밌다’고 평한다.

“스스로 도시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구나 생각해요. 사는 곳은 아무 상관없죠. 그저 내 방식대로 살며 창조적 만듦에 즐거움을 느끼고 있어요. 나이가 들어 나를 돌아봤을 때 ‘내 일하며 성실히 살았구나, 내 빛깔대로 행복하게 살았구나’ 느낀다면 그것이 성공한 내 삶인 거죠”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을 가장 사랑한다는 정미숙 원장은 지팡이를 짚을 나이가 되도 아이들 곁에서 ‘책 읽어 주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