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갑수

이른 새벽에 잠이 깨어 책을 읽었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꺼내 들쳐본 것은 오늘의 코로나 사태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알베르 카뮈는 내가 대학 시절 선망했던 작가 중 하나임을 말해야겠다.

아프리카 알제리의 해안에 오랑이란 도시가 있었다. 이 소설은 의사 류가 쥐 한 마리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시작된다. 이어서 도시는 곧 무서운 재앙에 휘말린다.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전염병으로 인해 인간들은 극도의 혼란에 빠진다. 마침내 봉쇄령이 내려 도시는 외부와 단절된다. <페스트>는 이 봉쇄된 도시에서 재난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몇 가지 유형을 보여준다.

생필품이 동나기 시작한 기회를 타서 한몫 잡으려고 하는 속물이 있다. 반면에 함께 힘을 합쳐 난관을 타개해야 한다는 적극적인 의인도 있다. 타루나 그랑과 같은 전전한 시민들이다. 그들은 재난은 언젠가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시민을 조직하여 페스트와 맞선다. 하지만 환자는 무서운 속도로 늘어나면서 한 집 건너 사람이 죽어 나간다.

한편 신문기자 랑베르가 있다. 취재차 도시에 와 있던 그는 이 무서운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는 도시가 자기와는 무관하다는 판단 아래 애인이 기다리고 있는 파리로 가기 위하여 온갖 탈출 방법을 찾아 헤맨다.

다음으로 신부 파늘루가 있다. 그는 전염병을 신의 분노와 징벌이라고 여긴다. 인간이 사악해지고 타락했으니 이런 불행을 겪어 마땅하다. 신부는 설교시간에 회개하라고 외친다. 신부는 한 어린아이의 죽음 앞에서도 인간의 죄를 언급한다.

마지막으로 의사 류가 있다. 그는 격리환자 수용소 벤치에 앉아 더위와 울분과 피곤으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다가 다가오는 신부를 보자 냉소적으로 힐난한다.

“적어도 이 애는 아무 죄가 없었습니다. 당신도 그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어린애들마저도 주리를 틀도록 창조해 놓은 세상이라면 나는 죽어도 당신의 신을 거부하겠습니다.”

의사 류는 죽음과 맞서 싸우며 말없이 환자 치료에 전념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행위가 사태를 호전시키는 데 별 도움이 되지는 않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말은 ‘구원’이라는 사탕발림이다.

카뮈의 <페스트>는 인간이 자기 책임도 아닌 일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려들 때 빚어내는 혼돈과 방황과 항변과 극복의지 등을 민감한 문체로 세밀하게 보여주는 소설이다.

극복할 수도 저항할 수도 없는 불행이 닥쳤을 때 인간들은 각기 저마다의 관점으로 문제를 파악한다. 이때 바로 그 재난이라는 현실을 추상적으로 대하려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며 이런 경향은 종교인과 지식인 부류에서 많이 나타난다.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지 못하고, 자꾸 어떤 의미를 덧붙이고 모호한 관념으로 대할 때 인간은 재난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고 또다시 그 재난이 찾아오게 되면 똑같이 어리석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전염병은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없어지지 않는다.

어느 날 페스트는 도시에서 소리 없이 나가 버린다. 사람들은 기뻐한다. 가장 불평불만이 많고 비관적이었던 사람일수록 더욱 기뻐한다. 의사 류는 말한다.

“이 환희가 항상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병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수십 년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 있고,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서 꾸준히 살아남아 있다가 아마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가지고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