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진시황 친자확인소송

진시황 이야기 - 3
[ 2019년 12월 20일 제249호 ]
영암우리신문l승인2019.12.23l수정2019.12.24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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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시사평론가
김갑수

진시황이 누구의 아들인가의 문제는 2000년 동안 중국 역사학계가 풀지 못하고 있는 미스터리입니다. 진시황의 진짜 아버지는 누구인가? 둘 중의 하나임은 틀림없습니다. 여불위(呂不韋)와 자초(子楚, 훗날 장양왕) 중 하나입니다.

장양왕 자초는 재위 3년 만에 급서했습니다. 이때 13세의 아들 영정이 대를 이었는데 그가 바로 진시황입니다. 이로써만 보면 진시황의 아버지는 장양왕 자초라고 해야 하겠지요.

여불위는 진(秦)나라 태자(안국군)의 서자로서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던 자초를 자신의 재력을 이용해 진나라 왕(장양왕)으로 만든 인물입니다. 또한 그는 진나라의 상국으로서 어린 진시황을 대신하여 진나라를 정치·군사는 물론 경제·문화적으로도 전국시대 최강국으로 올려놓았습니다.

여불위는 자초가 조나라에 인질로 있던 시절 자신의 애첩 조희(趙姬)를 자초에게 주어 아들을 낳게 했는데, 그 아이가 바로 진시황입니다. 조희는 고혹적인 외모에 ‘춤을 아주 잘 추는 한단의 여자’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런데 조희가 자초에게 갈 때 이미 여불위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는 겁니다. 물론 이 사실을 조희는 숨겼습니다. 조희 자신도 처음에는 임신 사실을 몰랐었을 수도 있겠지요. 아니면 조희 자신도 임신 사실은 알았지만 배 안의 아기가 여불위의 것인지 자초의 것인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로 인해 여불위는 진시황의 생부(生父)로 알려지게 됐지요.

여기서 잠깐, 여불위는 만만치 않은 인물입니다. 거상(巨商) 출신인 그는 정치적으로 대단한 책략가였으며 행정적으로도 뛰어난 재상이었습니다. 《사기》 <여불위 열전>에는 그의 문하에 모인 식객이 3천 명이 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탁월한 법가 정치가 이사(李斯)가 진시황에게 등용된 것은 여불위의 추천에 의해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불위가 편찬한 《여씨춘추》는 ‘글자 수가 20만 자에 이르고, 천지와 만물, 고금의 사상과 사건들을 모두 완벽하게 서술’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는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의 저잣거리에 이 책을 펼쳐놓고, "한 글자라도 더하거나 뺄 수 있는 자에게 천금을 주겠다’고 했으나,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럼 다시 진시황의 아버지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진시황의 아버지는 장양왕이 아니라 여불위라는 설을 최초로 제기한 사서는 사마천의 《사기》 입니다. 사마천은 《사기》 <여불위열전>에다 진시황의 아버지가 여불위라는 사실을 거의 6하원칙에 의해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런 사실은 <여불위열전> 외에도 대단히 권위 있는 사서들인 반고의 《한서》와 사마광의 《자치통감》 에 의해서도 보강되고 있습니다. 《한서》 <거상전>에는 ‘여불위는 자초가 임신 중인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바쳤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정사인 《자치통감》의 권위는 《사기》보다 우월합니다.

이렇게 ‘진시황은 여불위의 자식’이라는 학설이 힘을 받는 이유는 권위 있는 문헌의 기록 때문입니다. 일단 우리는 심증이나 추론으로 문헌의 기록을 뒤집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진시황은 여불위의 자식이 아니라 장양왕의 자식이 맞다는 반론도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것일까요? 류안(劉安, 기원전 179~기원전 122)이 저술한 《회남자(淮南子)》에는 진시황을 ‘여정’이 아닌 ‘조정’으로 표기함으로써(이건 결국 진시황은 여씨가 아닌 조씨라는 것) 진시황은 자초의 아들임을 기정사실로 해 놓고 있다고 합니다.

이 밖에도 동한의 왕부가 지은 《잠부론》 등에도 진시황의 아버지는 장양왕 자초라고 되어 있습니다. 중국 학계에서는 대체로 한, 당, 송 시대까지는 진시황을 여불위의 자식으로 인식했는데 이런 인식은 명, 청대에 들어 균열됩니다.

역사에서 이런 혼선이 빚어지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왕가의 혈통은 어느 역사에서도 명확하게 기록되는 법입니다. 예컨대 조선왕조를 창업한 태조 이성계의 족보는 4대조(목조 - 익조 - 도조 - 환조)에 걸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지요.

나는 이런 혼선의 책임은 사마천에게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사마천은 <여불위열전>에다는 진시황이 여불위의 자식이라고 해 놓고 본기인 <진시황본기>에는 진시황이 장양왕의 자식이라고 군더더기 없이 기록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마천의 《사기》 전체에서 진시황 생부의 기록은 모순됩니다. 결국 진시황의 생부가 누구인가를 놓고 빚어진 혼선은 사마천이 책임져야 할 문제라는 게 내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현대의 중국 사학계는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을까요? 제3의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중국의 현대 사학계에서는 ‘진시황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버지가 누구이든지 간에 진시황에 대한 평가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주장이 세를 얻고 있습니다.

이런 주장은 일견 합리적인 것 같고 심지어 인도적(?)인 것 같지만 나는 이런 주장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은 역사 연구의 포기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을 때 ‘모르겠다’, ‘누군들 어떠랴’ 식의 흐리멍덩한 결론을 낼 바에야 차라리 논쟁을 계속하는 게 낫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아무튼 역사 기록들이 서로 다르다면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문헌에 의지할 수는 없습니다. 이럴 때에는 문헌보다도 현대 의학적 해결이 합리적입니다. 이 문제는 친자확인소송이라도 해서 유전자 검사라도 해야 밝혀질 수 있는 일인데 이건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까요? 물론 이 문제는 과학적 증명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약간의 의학적 판단과 논리적 추론을 통해서라면 ‘진시황의 아버지는 000이다’라는 결론을 낼 수 없는 게 아닙니다. 미리 결론을 말한다면 나는 진시황의 아버지는 여불위가 아니라 장양왕이라고 봅니다. 이 결론에 대한 해명은 다음 글에서 해 보겠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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