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운명의 갈림길, 이성계와 최영의 작별 장면

요동정벌과 위화도회군 - 7
[ 2019년 11월 22일 제245호 ]
영암우리신문l승인2019.11.22l수정2019.11.22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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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갑수

이성계의 군대가 회군하는 동안 서경(西京)에서 개경에 이르는 수백 리 사이에 우왕을 좇던 신료(臣僚)와 개경 사람과 이웃 고을 백성들이 술과 음료(飮料)로써 영접했다. 또한 동북면의 군사 1천여 명이 이성계의 부대로 와서 합류했다.

우왕은 개경으로 도망해서 화원(花園)으로 들어갔다. 최영이 우왕을 막아 싸우고자 하였다. 이성계는 백관(百官)에게 명하여 무기를 가지고 시위(侍衛)하게 하고 수레를 모아 골목 입구를 막는 방법으로 우왕과 최영의 군사를 고립시켰다.

1388년 6월 1일, 개경을 포위한 요동 원정군은 본격적인 개경 공략에 나섰다. 최영의 부대는 나름 분전했으나 전력 차가 너무 컸다. 성문이 돌파 당하자 최영은 시가전을 벌이며 요동 원정군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하지만 성문이 돌파된 시점에서 개경의 민심 또한 이미 기울어 버렸다. 개경 백성들은 이성계 부대에 음식을 제공하며 지원했다. 최영은 점차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이성계는 억류했던 김완을 우왕에게 돌려보내며 회군의 정당성을 다시 한 번 설파했다. 이성계는 우왕에게 따로 사람을 보내, 이 사태는 모두 최영의 독단 때문에 일어난 것이므로 최영을 쫓아낼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우왕은 이를 거부하였을 뿐 아니라 이성계와 조민수의 관직을 삭탈하고 이들을 체포해오는 자에게는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큰 상을 내릴 것이라는 포고령까지 내렸다. 이처럼 이성계는 어떤 일을 하기 전 반드시 명분을 축적하는 작업을 미리 해 놓는 형이었다. 그는 명분 없이 일을 서둘러 하는 것을 늘 경계했다.

당시 우왕은 영비(최영의 딸)와 함께 화원의 팔각전에 있었다. 최영이 초췌한 모습으로 화원에 들어오자 우왕은 모든 게 끝났음을 직감했다. 곧 이어 곽충보 등의 요동 원정군이 최영을 체포하기 위해 화원에 진입했다. 우왕은 최영의 손을 잡고 울면서 최영을 보냈다.

이성계는 최영과 대면했다.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최영에게 회군의 명분을 설명했다. ‘이 사태는 모두 당신의 독단 때문에 일어난 일이지 나의 본심이 아니다. 당신이 독단적으로 요동 원정을 결정한 탓에 국가에 화가 되었고 민심이 도탄에 빠졌다. 오늘의 일은 부득이한 선택이었으니 이해해주길 바란다’는 취지였다.

우왕은 국적인 말로를 선택했다. 이성계에 의해 허수아비로 전락한 우왕은 역전의 기회를 노렸다. 그는 이성계와 조민수 둘만 죽이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내시 80명을 동원해 이성계와 조민수의 집을 급습시켰다.

하지만 이성계와 조민수는 미리 알아차렸는지 둘 다 집을 비우고 나가 있었다. 우왕이 보낸 내시들은 오히려 보초병들에게 격퇴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이성계와 조민수는 우왕을 폐위시켜 강화도로 추방했다.

한편 최영은 일단 고봉현(高峰縣)에 유배(流配)됐다가 우왕 다음에 창왕이 들어선 후 참형에 처해졌다.

<태조실록> ‘총서’는 당시의 상황을 아래와 같이 전한다.
- 태조가 최영에게 ‘이러한 사변은 나라가 편치 못하고 인민이 피곤하여 원망이 하늘까지 이르게 된 까닭으로 일어난 것으로 부득이한 일이오. 잘 가시오’라고 했다. 이에 서로 마주보며 울었다. -

최영은 패장이 되어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것은 한 시대가 다하고 새 시대가 열리는 역사의 전환점이 낳은 불가피한 산물이었다.

조선 역사서 중 가장 최근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왕조실록》(2019년 3월 발간 1,2권 합 1140쪽)을 쓴 신동준 선생은 이성계와 최영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강평한다.
- 이성계의 입장에서 볼 때 최영은 대선배다. ‘총서’의 기록이 사실에 가까울 가능성이 크다. 사실 이성계와 최영 모두 고려조 말기에 난세를 바로잡기를 바라는 백성들의 여망에 부응할 수 있는 대표적인 군벌이다.

그러나 서로의 입장이 달랐다. 최영은 온건 개혁파를 대표한 데 반해 이성계는 정도전 등 급진 개혁파의 지지를 받았다. 두 사람은 우왕 14년인 1388년에 이인임 일파를 몰아낼 때만 하더라도 서로 힘을 합쳤으나 노선 갈등으로 인해 서로 다른 길을 걸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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