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이성계, ‘4불가론’을 말하다

요동정벌과 위화도회군 - 4
[2019년 11월 1일 / 제242호]
영암우리신문l승인2019.11.05l수정2019.11.06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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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갑수

고려 말 요동정벌이 무산된 데 대하여 지금도 아쉬움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나라가 영토를 넓힐 수 있는 호기였는데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으로 그르쳤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도울 김용옥도 이와 비슷한 견해를 피력하는 것을 본 일이 있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위화도회군이 비판의 대상이 된다. 또한 위화도회군으로 인한 조선 창업까지도 그 정당성을 의심받게 된다. 이런 관점은 주로 역사의 과대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 또는 조선 창업을 혁명이 아닌 반란으로 규정한 식민사관에 영향 받은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난다.

하지만 당시의 요동정벌은 요동 땅을 우리 영토로 만들려는 의도로 기획된 것은 아니었다. 명나라가 고려 철령 이북의 땅을 과거에 원나라의 통치 구역이었다는 이유로 반환을 요구했는데 고려가 이를 거절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요동정벌은 고려가 이를 거절했으니 명이 철령 지역으로 침공해 올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요동정벌은 만약 명이 침공해 올 경우 원나라 시절 고려의 철령 지역을 관할했던 요동의 요양성 군사가 사용될 것이므로 선제적 방어를 위해 요양성을 치자는 의도에서 기획한 것이었다. 마침 이성계는 요양성을 한 차례 공격하여 성과를 낸 경험이 있던 터였다. 요양성은 지금 심양 남쪽 70km 지점 요양시에 위치한다.

그런데 과연 명의 침공이 정말 급박한 현실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철령 지역은 이성계의 지역 기반인 동북면과 겹친다. 그러므로 명이 침공할 경우 가장 큰 타격을 받을 사람은 이성계였다. 하지만 그는 요동정벌에 반대했다. 유명한 4불가론은 이때 나온 것으로서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 4월 을사일 초하루 우왕이 최영(崔瑩)과 단독으로 요동을 공격할 것을 결정하고 감히 드러내어 말하지 못하였다가, 이 날 최영과 우리 태조(太祖, 이성계)를 불러 이르기를, “과인이 요양(遼陽)을 공격하고자 하니 경 등은 마땅히 힘을 다하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태조가 이르기를, “지금 출병(出師)하는 것은 4가지 불가한 것이 있습니다. 작은 것으로 큰 것을 거스르니 1가지 불가한 것이오, 여름에 군사를 내니 2가지 불가한 것입니다. 거국적으로 멀리 공격을 나가니 왜구가 그 빈틈을 틈탈 것이니 3가지 불가한 것입니다. 마침 장마철이어서 활과 쇠뇌(다연발 활)의 아교가 느슨하고 대군이 질병이 돌 것이니 4가지 불가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 (고려사, 1388년 4월)

이성계의 4불가론은 대단히 논리적이어서 반박하기가 어렵다. 아마도 이성계 개인이 아닌 정도전 등 참모진의 창작이 아닐까 한다. 이 중에서 1번 ‘소국 - 대국론’을 가지고 사대주의라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는데,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명분론이나 이상론에 치우친 견해가 아닐까 한다. 이를 정확히 규명하기 위해서는 당대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농업국가에서 농번기인 여름에 군대를 일으키는 것은 백성에게 큰 폐를 끼치게 되므로 거의 금기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요동정벌은 이성계를 소외시킨 채 우왕과 최영에 의해서 추진되었다. 이성계는 우왕에게 다시 반대 의견을 개진했다.

- 우왕이 태조를 불러 이르기를, “이미 군대를 일으키기로 되었으니, 중지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태조가 다시 아뢰어 이르기를, “전하께서 반드시 대계를 이루고자 하신다면 마땅히 서경(西京)에 머무시어 가을을 기다려 병사를 내십시오. 곡식이 들을 뒤덮어 대군이 먹을 것이 족하여 북을 울리며 나아갈 수 있을 만할 것입니다. 지금은 병사를 내기에 적당하지 않으니, 비록 요동(遼東)의 한 성을 함락시킨다 하더라도 비가 내리면 군대가 앞으로 나갈 수도 없고 퇴각할 수도 없으니, 군대가 지치고 양식을 소진하면 화만 빨리 불러일으킬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우왕이 이르기를, “경은 이자송(李子松, 요동정벌에 반대하다가 우왕에게 처형당한 문신)을 보지 못했는가?”라고 하였다. 태조가 대답하여 이르기를, “이자송이 비록 죽었지만 아름다운 이름은 후세에 드리워질 것입니다. 신들이 비록 산다 하더라도 이미 계책이 잘못되었으니 무엇에 쓰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우왕이 듣지 않았다. 태조가 물러나 눈물을 흘리자, 휘하의 병사들이 “공은 무슨 일로 이리 심하게 슬퍼하십니까?”라고 하였다. 태조가 이르기를, “백성들의 화가 이로부터 시작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 (고려사 1388년 4월)

《고려사》에는 우왕을 무책임하고 향락적인 인물로 기술해 놓았다. 반면 이성계는 매우 신중하고 애민에 투철한 인물로 기술되어 있다. 각각 다소간의 과소와 과장이 없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우왕과 이성계의 인물됨이 대조적이었던 것만은 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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