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자식 남기고 끌려갔던 아버지…병 얻어온 것이 전부”

[2019년 9월 27일 / 제237호]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에 끌려갔던 영암 사람들 <7> 박준영 기자l승인2019.09.27l수정2019.09.27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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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우리 대법원에서는 강제징용에 따른 피해자에게 전범기업이 배상해야 한다는 내용의 판결이 잇따랐다. 대법원 판결 이후 국내에서는 일본제철, 후지코시, 미쓰비시 같은 전범기업의 국내 재산을 압류하기 위한 법적절차가 진행 중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이 대(對)한국 수출규제를 통해 경제보복을 자행하며 국가간 갈등으로 확대했고, 우리 국민들과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며 분노하고 있다.

 

일제강제동원 피해 도망다녔지만 결국 동원에 차출된 故 박창현 씨
자신뿐만 아니라 3형제 모두 강제동원 차출되며 한 집안 풍비박산

넉넉한 삶은 아니었지만 3남 1녀의 자녀를 두고 가족과 함께 미암면에서 농사를 지으며 평범하게 살았던 故 박창현 씨는 어느날 갑자기 일본 순사에게 쫓기는 신세가 됐다.
당시 구장(현 이장)이 박창현 씨를 일제강제동원 대상자로 뽑았기 때문이다. 몇날 며칠을 숨어 지냈으나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렇게 강제로 동원된 박씨는 1943년 5월 20일 함경북도 경원군 조선인조석유(주)가 운영하던 아오지탄광에 배속돼 석탄을 캐는 일에 동원됐다. 그러다 홋카이도 북해도 탄광으로 이관돼 약 2년 6개월여 동안 강제동원 노동자로 살아야 했다.
죽음보다 못한 삶의 연속이었다. 엎드려서 파낼 수밖에 없는 좁은 갱도에서 덥고 고통스러운 중노동에 몸은 쇠약해져갔다. 아파도 끊임없는 매타작에 아프다는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씨는 고향에 둔 아내와 자녀들을 위해 끝까지 버텼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일제강제동원에 가족들의 삶은 궁핍했다. 어머니는 바느질 삯과 품앗이 등으로 자식들을 부양해야만 했다. 셋째였던 박성화씨도 어려운 가정형편에 초등학교만 졸업한 채 생계벌이에 나서야만 했다.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800평 남짓의 논에서 농사를 짓는 일부터 남의 논일까지 닥치는 대로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없는 탓에 가정형편은 자꾸만 기울어져갔다. 빚은 자꾸만 늘어 집안의 유일한 재산이었던 800평 남짓의 논마저도 팔아야만 하는 상황이 됐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아버지를 대신해 어른 역할을 해왔던 작은아버지 2명마저도 일제 강제동원에 차출되면서 더욱 가세는 기울어져만 갔다. 2년여의 시간동안 아버지의 생사는 알 수 없었다. 편지 한 통도 오지 않았다.
가족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궁핍한 생활에 아버지의 생사보다는 당장의 가족들의 생사가 더욱 중요했기에 아버지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이유였다.
그러던 중 거짓말처럼 아버지가 돌아왔다. 강제동원에 차출돼 가족을 떠나는 날처럼 갑작스럽게 가족들 앞에 아버지가 나타났다. 그날의 기억에 대해 박씨는 “아직도 아버지가 돌아오신 날이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해”라며 “저녁 무렵이었는데 아버지가 인민복 같은 노란색 바지에 머리에는 전등이 달린 모자 같은 것을 쓰고 집에 오셨는데 내가 기억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었어”고 설명했다.
박씨의 아버지는 박창현 씨는 미암면에서도 손꼽히는 일꾼으로 건장한 풍채를 자랑했으나 강제동원에서 돌아온 모습은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쇠약해져 있었다. 손과 발에는 동상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탓에 퉁퉁 부어 있었고 얼굴은 피골이 상접해 뼈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 눈을 뜨고는 볼 수 없는 실정이었다.
2년 6개월여 만에 가족 품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집에 오시자마자 앓아 누우셨다. 가족들을 위해 밤잠을 설쳐가던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병수발이라는 더 큰 짐이 얹어졌다. 아버지와 함께 강제동원을 갔던 아버지의 형제들의 사정도 비슷했다. 이러한 모습은 아버지가 50대 후반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됐다. 
유가족 박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아들인 내가 눈물이 안나더라고. 근디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은 정신을 놓을 정도로 너무 힘들더라고”라며 “어렸을 때부터 가족들 때문에 고생하시는 어머니가 마음에 걸렸는가벼”라고 말했다. 이어 박씨는 “요즘 텔레비전을 보다 일본놈들이 경제보복이네 뭐네 하믄 콱 때려죽여불고 잡은 마음도 들어”라며 “우리 집안이 뭔 죄를 지었다고 아버지 형제 모두를 데려가서 반 병신을 만든 것도 원통헌디 이제는 나는 모른다고 발뺌을 하는 것을 보믄 미처불제”라고 덧붙였다.
누구보다 원통한 삶을 살았던 박창현 씨의 가족이지만 이들은 일제 노무동원 피해 손해배상 소송인단에 참여할 수 없었다. 소송 주체인 회사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에 박씨는 일제의 강제동원으로 인해 힘겨웠던 삶을 살았던 자신들의 가족을 위해 꼭 다시 한번 소송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으면 하는 것이 바람이다.
박씨는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항상 병치레하는 것이 전부이다”며 “아픈 아버지를 위해 어린 나이부터 쉼없이 일을 해도 가난은 지금까지도 그대로다. 이에 대한 보상은 누가 해줄 것인가. 이 억울한 마음을 정부가 꼭 해결해 줬으면 한다”고 바람을 밝혔다. 

박준영 기자  news@woori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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