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의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제 한국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합병조약을 하고 일주일 뒤 조약이 공포됨으로써 우리나라는 국권을 상실했다.
국권을 침탈당했던 치욕의 날인 8월 29일을 ‘경술국치일’이라 부르고, 이날을 잊지 않고자 전국의 지자체를 중심으로 국기게양대에는 조기가 게양되고 있다. 
특히 올해는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경제보복 조치를 자행한 일본에 대해 우리 국민들은 불매운동과 더불어 가정에서도 조기게양을 하자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아직까지 청산되지 못한 친일과 관련된 문제가 지역사회에서도 여전히 논란을 낳고 숙제로 안겨지고 있다. 
지난 19일 학산면사무소 앞. 이곳에서 만난 주민 A씨는 “친일 인사인 현기봉 씨의 비석이 학산면사무소 앞에 떡하니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심장이 두근거렸습니다. 비석을 옮기는 못할지언정 그의 행적을 있는 그대로 알리는 안내판이라도 세웠으면 좋겠습니다. 두고두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고 말했다.
이 주민이 가리킨 비석은 학파(鶴坡) 현기봉(玄基奉, 1855∼1924)의 수의비이다. 비석은 조선시대 말이었던 1888년(무자년) 대기근 때 자신의 쌀 창고를 열어 목포와 영암지역에서 구민활동에 나섰던 현기봉의 공덕을 기려 1912년 주민들이 세운 것으로, 삼호면 서창리 포구 쪽에 세워져 있던 것을 2004년 6월 학산면사무소로 옮겨와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지역의 유지이자 호남의 갑부로서 현기봉 씨의 행적은 충분히 칭송받을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친일 인사로서 현기봉을 칭송하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엇갈린 평가가 나오고 있다.
학파 현기봉은 신흥제철소를 설립한 인물로, 광주농공은행 이사, 일청생명보험회사 상의원등을 지내는 등 일제에 적극 협력하여 조선총독부 참의를 지낸바 있는 대표적인 친일 정치인이자 기업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차남인 현준호 또한 담양의 창평영학숙과 휘문의숙에서 공부했다.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유학한 현준호는 유학 후 호남은행을 설립하고 대표가 됐다. 또 1924년 전라남도 평의원에 올랐으며, 1930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가 돼 해방 때까지 중임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은 일제의 조선통치에 도움이 된 자 또는 공로가 있는 자, 그리고 적극적으로 협력해온 자들을 참의로 임명해 내선일체와 식민화에 앞장섰던 친일의 상징이다. 
광복 후 1949년 친일행적으로 반민특위에 체포되자 결백을 주장하며 불구속 수사를 받았고 반민특위가 해체되는 바람에 친일행적에 대한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이러한 친일 행적으로 인해 학파 현기봉과 아들이었던 무송 현준호는 1935년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에 수록됐다. 또한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과 광복회가 공동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됐다. 
또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표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됐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됐다. 
이같은 사실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도 손쉽게 찾을 수 있는 기록이다.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지역의 존경을 받았던 대지주였을지 모르나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는 철저한 친일 인사였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학파 현기봉에 대한 설명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무렵, 현기봉과 같은 집안사람이라는 주민 한 명과 지인 한 명이 다가왔다. 이 사람들은 수의비를 한참 들여다보며 “학파공의 공덕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며 그의 공적을 하나씩 나열했다. 
자랑스럽게 현기봉에 대한 설명을 하던 그들에게 친일 행적에 대해 묻자 이들은 정색하며 현기봉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고 그의 아들인 현준호가 세운 호남은행에서도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고 일본인을 채용하거나 일본인에게 융자를 해지 않았으므로 그가 민족 기업인이며 독립운동을 후원했던 민족 자본가라고 주장했다.
특히 중추원 참의라는 직책은 당시 시대상황에 비춰볼 때 기업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주장했다. 옆에 있던 한 주민은 “영암이 이만큼 먹고 살 수 있도록 해준 것이 현기봉 선생이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친일에 대해 논쟁이 심화되려 하자 이들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이들의 뒷모습을 보던 A씨의 입에선 깊은 한숨이 나왔다. A씨는 “저들이 하는 현기봉에 대한 이야기도 사실일 수도 있겠지만 친일을 한 것 또한 숨길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며 “하지만 현기봉에 대한 지역민들의 인식에는 친일행적은 거의 없다. 수의비를 없애면 안 된다. 지금 이 자리에 그대로 두고 그의 행적을 있는 그대로 적어놓은 안내판을 설치해 사람들이 보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A씨는 “독립운동가와 후손들이 고난과 고초를 겪었는데 비해 친일파는 여전히 건재하고 잘 살고 있다”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의 잔재를 없애는데 영암군이 중심이 돼 그들의 죄상을 알리는 단죄비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