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포면 성산리 방축암 마을에 사는 김삼남 씨는 자신이 태어난 지 5개월 만에 아버지를 잃은 탓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홀로 시어머니와 자식을 먹여 살려야 했던 어머니에게조차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일가친척 모두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싶어 했고 언급을 금기시하곤 했다. 
그나마 스쳐지나가며 들었던 이야기는 그저 아버지가 일제강점기였던 1943년 12월 8일부터 1945년 10월 7일까지 후쿠오카에 있는 미쓰비시의 이즈카광업소 나마즈타 탄광으로 강제징용 당했었고, 그로인해 진폐증에 걸려 힘들어 하시다가 유명을 달리했다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김씨가 아버지의 흔적을 찾고자 한 것은 일본 전범기업들의 책임 있는 답변과 사과를 받기 위함이었다.
정미칠늑약(丁未七勒約)으로 통치권을 빼앗기고 대한제국 군대마저 강제 해산당했던 1907년 정미년 여름, 김삼남 씨의 아버지인 故김홍업 씨의 기구한 삶은 시작됐다. 도포면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던 평범한 농사꾼이었던 故김홍업 씨는 나라를 빼앗기고, 친일 무리들의 횡포와 억압에도 자식들을 위해 악착같이 생활해 나갔다. 
하지만 故김홍업 씨가 비교적 늦은 36살의 나이에 일제강제징용에 동원된 것에 대해 김씨는 당시 마을주민이자 친일 앞잡이였던 김모씨가 좋은 조건으로 일을 시켜줄 것처럼 당시 마을사람들을 속여 광산·토건·군수산업 현장으로 보냈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인근마을에서만 6명의 주민이 일제강제징용동원 손해배상 소송 신청을 한 것으로 봐도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김씨의 추측대로라면 아버지는 자신이 부양해야할 가족들을 위해 더 좋은 조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은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가족에게 많은 돈을 벌어오겠노라 떠났던 아버지는 만 2년 만에 많은 돈이 아닌 진폐증을 안고 돌아왔고 8년 후 가족의 품을 영원히 떠났다. 
김씨가 기억하는 가족들의 삶은 항상 고달팠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아버지의 형제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고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대신해 할머니와 어머니가 실질적인 가장이었다. 아버지가 떠난 후에는 김씨보다 11살 많은 누님이 집안의 살림꾼 역할을 했다.
당시 철부지 어린아이였던 김씨에게 아버지의 삶과 죽음은 주요 관심사가 아니었다. 특히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크나큰 역사적 아픔을 두 번이나 겪었던 할머니와 어머니는 죽은자 보다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이 삶이 더욱 중요해 철부지에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되도록 삼갔다.
그렇게 김씨에게 아버지라는 존재는 기억에 남지 않은 분이었다. 그러던 중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 11월 국무총리실 산하에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하면서 김씨의 삶 속에 아버지 故김홍업 씨가 들어왔다.
이 위원회에서 강제동원 피해자 진상 조사를 벌였고 당시 조사에서 아버지 故김홍업 씨가 피해자로 인정을 받게 됐다. 해방 후 반세기가 지난 뒤에야 최초로 이뤄진 조사였다. 그 결과, 강제동원 피해자로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람만 21만8639명에 달했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강제동원 피해자로 아버지를 인정해줬으나 정작 전범기업인 미쓰비시와 일본은 아버지로부터 착취한 임금은커녕 한마디의 사과도 듣지 못했다.
이는 1965년 당시 박정희 정권이 맺은 한일기본조약 때문이었다. 이 조약은 문제의 ‘한일 청구권 협정’이 포함돼 있었고, 협정에 ‘한일 양국 간에 국가는 물론 국민의 재산, 권리, 청구권이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내용이 있었다. 일본은 이 협정을 근거로 우리 국민들에 대한 전후 배상은 이미 끝난 문제라고 주장하면서 임금과 배상금 지급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잊고 살았던 아버지, 고달팠던 아버지의 삶을 자신처럼 잊고 살지 않기 위해 김씨는 소송을 준비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자신조차 희미한 아버지의 기억을 찾아가는 것 자체부터가 난관이었다. 이에 자신보다 글눈이 더 밝은 조카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지만 “귀찮은 일만 더 많아진다”며 마다했다.
난감해하던 차에 도포면 봉호리의 故양순옥 씨가 강제징용과 관련해 자료를 수집했다. 그와 함께 흐릿했던 아버지의 흔적을 조금씩 찾아갔다. 그러던 중 지난 1997년 일본제철 강제징용 피해자인 여운택 씨 등이 일본 법원에 임금과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2003년 패소가 확정됐던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지난 2005년 우리 법원에 다시 소송을 제기해 2012년 5월 대법원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취지로 사건을 2심으로 돌려보내는 것으로 보고 소송에 나서게 됐다.
하지만 당시 피해자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본과 한일청구권 협정을 맺었던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며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와 함께 대법원 판결을 기약 없이 미루면서 허송세월해야만 했다.
대법원은 지난해 10월이 돼서야 전원합의체를 통해 한일청구권 협정과 상관없이 강제징용 피해자 개인의 배상 청구권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판결하면서 김씨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 찾기 소송은 전환점을 맞이한 상태다.
김씨는 “직계 후손마저도 강제징용에 대한 인식이나 관심이 낮은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애국을 하고 돌아온 것도 아닌 아버지를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고 돈 욕심을 부리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조상이 일제로부터 어떻게 핍박을 받았고 얼마나 어렵게 살았는가를 역사에 남겨주고 싶었다”고 소송에 참여한 계기를 밝혔다.
이어 김씨는 “강제징용 피해는 우리 아버지를 비롯해 수많은 민초들이 겪었는데 왜 합의는 피해자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정부에서 맺었는지 원망스럽다”며 “일본이나 일본 기업에 대한 문제 제기와는 별도로 정부 차원에서 강제징용 피해를 조사하고 아픈 과거를 위로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