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조선은 국왕부터 사대부까지 모두가 종교인이자 철학자로서 공감하며 움직인 나라였다. 종교, 사상, 철학, 정치, 학문, 교육은 유학의 이상 아래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 적어도 15세기 이후의 세계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500년을 지속한 생명력은 그렇게 마련되었다....” (《조선, 철학의 왕국》, 이경구 저, 2018년. p.344)
저자는 이 책의 제목에 ‘철학’이라는 서양에서 유래한 용어를 쓴 데 대하여 양해를 구하고 있다. 사실 이 책의 제목은 ‘조선, 성리학의 왕국’이라고 해야 더 적합할 듯하다. 또한 이 책에는 ‘호락논쟁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부제처럼 이 책은 호락논쟁과 관련된 내용 일색이다.
먼저 ‘성리학(性理學)’은 우리가 많이 쓰는 용어이다. 성리학은 주자학과 같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우리는 성리학 또는 주자학을 신유학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나는 이 용어가 가장 적당하다고 여긴다.) 신유학이 있으면 당연히 고(古) 유학이 있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고유학은 주자 이전의 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상고 적의 요, 순, 우, 탕, 주공과 공자, 맹자 등의 유학이 고 유학이다.
우리가 알듯이 중국에서 유학이 보편화된 것은 한(漢)나라 때였다. 한은 제국으로서 최초로 긴 수명을 유지한 나라이다. 그러나 이후 위진남북조와 당의 시대(3세기~9세기)에는 유학보다 도교나 불교가 더 융성했다. 이에 따라 당연히 유학에도 반성과 혁신이 요구되었다. 이런 요구에 부응한 학자로 주돈이, 소옹, 장재, 정호·정이 형제 등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주돈이는 태극과 음양오행론으로 우주, 만물, 인간의 생성을 설명했다. 소옹은 만물과 인간의 운세 그리고 지금의 형세 변화를 풀이함으로써 물리(物理)와 역리(易理)의 가설을 세웠다. 장재는 우주만물의 바탕을 기(氣)라고 하여 기철학을 선보였다. 정호·정이 형제는 기를 중시했던 장재와 달리 리(理)를 강조했다. 정호 정이 형제는 인간의 본성, 즉 성(性)이 곧 천리(天理)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성리학’이라는 용어가 나온 것이다.
한편 이 모든 것을 정교하게 융합하며 집대성한 이가 바로 주희(朱熹)다. 주희는 사서삼경을 유학의 경전으로 격상시켰다. ‘신유학’은 이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다. 주희는 주자로 높여 불리며 조선의 학자들은 성리학을 주자학이라고 불렀다.
다음으로 ‘호락(湖洛)’논쟁에서 ‘호’는 충청지방(호서, 湖西)을 가리키고 ‘낙’은 중국 낙양에 비유하여 서울을 가리키는 글자이다.
주자학의 거장 송시열에게는 두 수제자가 있었는데 권상하와 김창협이었다. 참고로 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언급 횟수가 가장 많은 인물이다. 83세에 사사되어 죽은 이 거장은 두 제자에게 유언을 남겼다.
“나는 한평생 주자의 글을 읽었네. 그 중에서 의심스러운 부분과 어려운 부분을 뽑아 대략 해설을 붙였지만 애석하게도 아직 완결하지 못하였네. 지금 이 일을 부탁할 사람은 오직 그대(권상하)와 중화(仲和, 김창협)뿐일세.”
권상하는 충청도, 김창협은 서울에서 살았는데 ‘호락’이라는 명칭은 이런 연유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호락논쟁은, 미발심체(未發心體, 미발 시 마음의 본질), ‘성범심동이(聖凡心同異, 성인과 범인은 같은가 다른가)’,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 인간과 동물은 같은가 다른가)’의 3가지 논제를 가지고 전개되었는데, 이 중 마지막 ‘인물성동이’가 핵심 논제였다. 대체로 호론은 인간과 동물이 다르다고 보았고 낙론은 같다고 보았다.
호락논쟁은 사단칠정론, 예송논쟁과 함께 조선의 3대 논쟁으로 간주된다. 17세기의 격동기를 지나 18세기에 접어들자 동아시아는 안정되었다. 청의 주도권이 확고해졌고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도 안정되었으며 조선에서는 탕평정치가 꽃을 피웠다. 이른바 동아시아의 평화가 도래한 것이다.
조·중·일 세 나라 중 조선은 유난히 학문을 중시했다. 실제로 인구 대비 학자의 수가 중국, 일본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다. 유학과 신유학은 대단히 보편적이고 개방적인 철학이다. ‘조선, 철학의 왕국’이라고 제목을 붙인 저자의 시도는 기꺼이 양해 받을 수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