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에 이원익을 생각해 본다

[2019년 6월 7일 / 제223호] ‘우리 것’에서 좋은 점을 찾아야 영암우리신문l승인2019.06.07l수정2019.06.07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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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경기도 광명시 소하 2동에는 조선의 재상 이원익의 집으로 알려져 있는 관감당(觀感堂)이 있다. 관감은 ‘보고 느끼라’는 뜻이다. 
다음은 1631년(인조 9년) 승지 강홍중이 왕명으로 이원익을 문병하고 낸 보고서의 일부이다.
“그가 거처하는 집은 잡목으로 지은 두어 칸 띠집인데, 겨우 몸이나 들일 정도입니다. 집이 낮고 작고 좁아서 형편없었습니다. 그 앞에 식솔이 들어 사는 집은 더욱 한쪽으로 기울어져 곧 허물어질 것같이 누추하여 비바람도 피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 곁에 한 이랑의 농사지을 땅도 없고, 또 두어 사람의 노비도 없어서 온 집안이 다만 매달 나라에서 주는 쌀로 목숨을 연장한다고 합니다.”
인조는 “40년 동안 정승을 지낸 사람이 다만 두어 칸 띠집을 가졌을 뿐이라니, 만일 모든 벼슬아치로 하여금 그를 본받게 한다면 백성의 곤궁을 어찌 근심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이원익은 왕이 새집을 지어 주고 흰 이불과 요를 내리려 하자 “나라에서 집을 지어 준다면 다른 고장으로 이사하겠다”고 하며 사양했다. 
그러자 인조가 이원익을 재차 설득하여 오늘의 관상감이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이원익은 1587부터 4년 동안 평안도 안무 목사로 재직했다. 안주는 평양과 함께 오늘의 평안도 이름을 짓게 한 지명이다. 이원익은 임명 다음 날 혼자서 말을 타고 현지로 떠났다.
대개 지방 수령 임명을 받으면 부임 준비 물품을 차리고 여기저기 유력자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한동안 서울에 머물렀다. 그러는 사이 신임 수령을 모시러 현지 아전들이 서울에 당도하면 그들과 함께 모양 있게 출발하는 것이 당시의 관행이었다.
홀로 말을 타고 임지에 다다른 이원익은 맨 먼저 흉년으로 굶주려 죽어가는 백성들을 목격했다. 그는 부임도 하지 않은 채 곧장 평안감사 김수를 찾아가 안주 목사 명의로 조곡 1만 석을 대출 받아서 굶주리는 백성들부터 먹여 살렸다. 김수는 이원익과 같은 시기에 조정에서 경연관을 지낸 사람이었다.
이듬해 풍년이 들어 이원익은 대출한 조곡 1만 석을 모두 상환했다. 당시 조곡 1만 석이 평안도 또는 안주 예산에서 비율로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이 따로 있다. 그것은 지방관의 요청으로 즉석에서 조곡 1만 석을 지급했다는 사실이다. 상부에 사전 보고도 하지 않은 채 지방 수령끼리 1만 석의 조곡을 대출 – 상환할 정도로 잘 정비된 조선의 행정 시스템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다음으로는 백성을 위하는(위민) 일이라면 맨 우선순위로 집행되었던 조선의 행정철학이다.
하나 더, 이원익은 36년 동안 재상을 지냈지만 앞에서 보았듯이 말년에 두어 칸짜리 띠집에서 살았을 정도로 청렴했다. 오늘의 한국인은 우리의 좋은 점을 우리 것에서 찾지 않고 남에게서 찾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경차를 타는 남미의 대통령이나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북구의 국회의원을 칭송한다. 조선 역사에는 우리의 칭송을 받을 만한 인물이 차고 넘친다.(<언제나 민생을 염려 하노니> 이정철 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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