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국장  우 용 희

지난달 25일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에서 가결된 ‘국회법 일부개정안’에 대하여 거부권을 행사하며 국회로 돌려보냈다.
‘법률에 위배되는 행정입법에 대해 국회가 정부에 수정을 요청할 수 있다’라는 내용으로 개정한 국회법에 대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것이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인해 ‘메르스’ 열풍은 조용히 사라졌으며, 전국의 이슈는 ‘배신의 정치’, ‘심판’, ‘국회법’, ‘친박’ 등으로 급격히 전환되었다.
3권 분립의 현행 헌법 체제하에서 국회가 입법권을 행사하듯 대통령 역시 행정 수장으로서 국회가 제정한 법률안에 대하여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즉 거부권 행사를 옳고 그름의 잣대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헌법상 권한이기에 거부권 행사만 놓고 탓하는 것은 잘못됐다는 말이다.
반면, 국회의 입장에서는 ‘국회법 개정’을 통해서 그동안 법률과 배치되는 행정입법(대통령령·총리령·부령)에 대한 국회에서 견제의 기능을 갖추고자 했으며, 그 타당성은 충분했기에 국회의원 95%(찬성 211, 반대 11)의 동의로 개정 법률안을 내놨다고 보여진다.
이런 국회의 ‘국회법 개정’ 의지를 ‘거래’와 ‘배신’이라 칭하며 거부권 행사의 목적이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대한민국 대통령의 격은 땅을 파고 있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거부권 행사에 대해 표면적으로 드러낸 첫 해명을 살펴보면 ‘당초 요구라고 표현했던 것을 요청이란 단어로 한 글자만 바뀌었다’는 것을 주된 이유로 밝혔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이 단어 때문이었다는 것에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평소 박근혜 대통령의 화법은 좀체 이해가 불가능할 정도로 의미 전달에 실패한 경우가 많았다. 이로인해 ‘박근혜 번역기’라는 것이 등장할 정도다. 여기에 국민들은 이미 ‘유체이탈화법’이라 칭하며 박근혜 대통령 어록을 만들어 ‘바른 문장’으로 만드는 연구와 재미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번 국회법에 대한 거부권 행사로 인해 박근혜 대통령은 ‘요청’과 ‘요구’에 대해서만큼은 ‘같은 뜻을 가진 명사’로 명확히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을 국민에게 알려주게 되었다.
‘유체이탈화법’ 따라하기나 수정놀이 따위로 대통령의 국어 능력을 의심하지 말라는 의미로 판단된다.

제헌 이래 64번 밖에 없었던 대통령의 법률안 거부권 행사, 그 이유였던 ‘요청(要請)’과 ‘요구(要求)’가 진정 같은 의미로 쓰이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알아볼 필요가 있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요청은 ‘필요한 어떤 일이나 행동을 청함’, 요구는 ‘받아야 할 것을 필요에 의해 달라고 청함’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사전적 의미로는 ‘받아야 할 것’이라는 차이만을 보인다. 더 깊게 풀이해보면 ‘요청’에 비해 ‘요구’에는 ‘좀 더 강력한 당위성’인 ‘꼭’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당위성 때문에 우리의 일상에서 ‘요청’과 ‘요구’는 ‘꼭 해야 할 필요성’이란 관점에서의 차이로 서로 다르게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배울만큼 충분히 배우신 분들이 ‘요구’와 ‘요청’의 해석 논란을 벌이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더구나 정치적 목적을 위해 국어학자와 법학자까지 논란에 끌어들여 ‘국어’에 ‘정치색’을 입히고 있다는 점은 기가 찰 정도다.

법률은 국가의 이익이나 국민들의 권익보호를 위하여 만들어져야 한다. 당리당략이나 특정인의 이익을 위하여 만들어져서는 안된다. 설령 대통령이라도 마찬가지다.
국회법 개정안이 오는 6일 재상정된다고 한다. 새누리당이 표결에 불참하겠다고 당론을 정리했기에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누구를 위해서 국회에 입성했는지…. 마지막 남아있을지도 모를 한 가닥의 양심에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