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효식품… 영암만의 브랜드로 법고창신(法古創新)

“열성유전자는 한 세대를 건너뛰어 발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껏 김치, 발효식품과 무관했던 나의 삶이 어느 순간부터 그쪽 분야로 자연스럽게 마음이 가고 마치 운명처럼 그 길을 향해 확신을 하고 열정적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을 느끼면서, 그동안 잠재했던 내 안의 어떤 열성유전자가 저를 발효식품 연구의 길로 이끄는 것 같았습니다.”
15일, 방문한 월출산을 바로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있는 ‘김명성 발효연구소(우리맛 지킴이 참발효 영농조합)’는 흡사 공원을 떠올리게 하는 잔디밭이 깔린 넓은 마당과 각종 장이 담긴 수많은 옹기, 장을 보호하는 듯 주변을 둘러싸고 세워진 솟대들, 연구소 안팎으로 옹기를 응용해 만든 조형물 등이 모두 자연과 어우러져 발효식품을 만들기에 적합한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그곳의 대표 김명성(42) 씨는 영암에서 초·중·고를 마치고, 광주에서 대학 졸업 후 평범한 회사원 생활을 했는데 처음부터 발효식품을 연구했던 것은 아니었다.
군대 제대 후 친구와 김치에 관해 이야기 나누고 농사를 짓는 선배들에게 절임배추를 재배하라고 권해본 것이 전부였다는 김 대표.
그런 그가 본격적으로 발효식품에 대해 입문하게 된 계기는 그의 아내였다.
그는 결혼하면 아내에게 꼭 자신이 직접 담근 김치를 맛보게 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결혼 후 어릴 적 어머니 손맛이 느껴지는 ‘맛있는 김치’를 떠올리며 아내에게 만들어줬지만, 그때의 김치는 그가 기억하는 ‘그 맛’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때부터였다. 그는 스스로 생각해도 놀라울 정도로 김치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점차 그쪽 분야의 일을 해보고 싶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다녔던 회사를 관두고, 김치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이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에 좀 더 전문적으로 김치를 잘 담그기 위해 김치에 관한 책, 학원 등을 다니며 비법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비용과 시간을 쏟은 만큼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했다.
김치 담그기를 배우고 만들며 겪었던 숱한 실패 속에서 그는 문득 맛을 내는 근본 원인에 대해 깊이 파헤치기 시작했는데, 갖은 양념을 넣지 않고 소금과 젓갈만 잘 써도 김치의 맛이 확연히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래서 그는 직접 발로 뛰며 1년 정도 좋은 재료를 찾아다니고 명인을 쫓아다니면서 ‘맛있는 김치’의 비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가 들려준 갖가지 경험담과 지식은 김치에 무관심한 사람도 솔깃할 내용이 가득했는데,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멸치젓에 대한 이야기였다. 김치에서 흔히 사용하는 멸치젓과 새우젓 중 멸치젓은 만드는 방법에 따라 그 맛이 각각 달라진다고 하는데, 그 중 첫 번째 방법은 옛날부터 어부들이 바다에서 멸치를 잡은 후 바로 젓독에 멸치를 넣어 놓는 것. 그렇게 하면 젓독에서 죽은 멸치의 배가 불러 부패하면서 나온 멸국이 젓독 밖으로 빠져나와 역한 냄새를 풍기면서 배를 부식시킨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아는 냄새나는 멸치젓이다. 두 번째는 살아있는 멸치를 잡아 바로 항구에서 독 안에 소금과 멸치를 버무려 숙성시키는 방법인데, 이 방법이 가장 높은 신선도를 자랑하고 맛도 좋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했을 때 배에서와는 달리 멸치에서 나온 멸국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그대로 머무르기 때문에 역하지 않은 고소하고 담백한 맛을 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멸치젓의 맛을 좌우하는 가장 큰 요인은 바닷물의 환경이다. 각자 극과 극의 물에 사는 멸치보다 갯물과 맑은 물 사이를 오가는 멸치가 맛이 좋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이에 해당하는 지역은 추자도.) 그렇게 그가 겪은 숱한 시행착오와 경험을 거쳐 얻은 소금, 젓갈에 대한 지식과 비법은 조금씩 김 대표에게 이미 알려진 방법의 틀을 바꾸는 계기를 마련했고, 이 과정에서 그가 깨달은 진리는 ‘맛을 내는 기본원리부터 제대로 알고 시작하라(0부터 시작하라)’였다.
수학에서 공식을 외우는 것이 중요하지만, 기본부터 확실히 알아야만 어떠한 문제가 나와도 응용해서 풀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김 대표는 그렇게 노동력과 시간을 절감해 여러 가지 양념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맛이 아닌, 조상들이 해왔던 전통방법을 고스란히 간직한 ‘슬로우 푸드’의 진수를 토대로 기본 재료의 맛부터 찾는 김치 담그기에 역발상을 시도했고, 점차 연구 범위를 넓혀 ‘발효’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해 김 대표만의 맛있고 몸에 좋은 발효식품들을 탄생시켰는데, 된장, 고추장, 간장, 가양주, 조청, 천연 식초가 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역발상은 된장과 간장의 기본이 되는 ‘메주 만들기’이다. 일반적으로 메주를 만들 때는 한 가지 콩을 가지고 불려서 삶은 후 으깬 다음, 촘촘히 빈틈없이 네모로 만들어 곰팡이가 날 때까지 따뜻한 아랫목에 놓은 후 메주가 안정적으로 매달리도록 끈으로 묶어 밖에 띄우고 장을 담글 때 토속신앙을 받들어 웃소금, 숯, 고추 등을 함께 넣는다. 그런데 김 대표는 물에 콩을 삶는 방법이 아닌 메주의 쿰쿰한 냄새를 없애주는 자신이 제조한 발효액에 콩을 삶는 방식을 택해 의사와 전문가들이 말한 건강을 해치는 염도의 비율을 낮췄으며, 메주를 빚을 때 엉성하게 빚음으로써 무해한 곰팡이(메주에서 생겨나는 곰팡이는 5가지가 있는데 이 중 노랑, 황갈색, 하양 곰팡이는 무해. 반대로 유해한 곰팡이는 검정, 푸른곰팡이다.)의 숨구멍을 만들어 발효에 필요한 곰팡이만 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그리고 방안에 틀어박혀 메주를 살피며 유해 곰팡이가 나는지 수시로 관찰해 메주를 띄우고, 옛날과 달리 오늘날에는 전혀 통하지 않는 토속신앙을 배제한 후 발효가 잘되는 수제옹기에 장을 담근다. 이렇게 일본의 된장(미소)처럼 ‘냄새나지 않고 짜지 않은 한국의 맛을 살린 장’을 만들어낸, 이론과는 전혀 맞지 않는 그의 방법을 본 장 전문가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고, 현재는 굳이 알리지 않아도 그의 경험과 연구 노하우가 묻어나는 여러 가지 발효식품과 장인 정신을 알아본 각 지역의 사람들, 전문가들이 배움을 얻고자 끊임없이 그를 찾고 있다.

그래서 김 대표는 천연식초를 제외한 김치, 고추장, 된장, 간장과 같은 발효식품은 판매하지 않고 있지만, 보다 많은 사람이 직접 장 담그기를 체험하며 올바르게 익힐 수 있도록 강좌를 개설하고 있다.
김 대표는 “다른 지역처럼 영암도 지역 특산품을 세계적으로 알릴 수 있는 심포지엄을 개최하는 기회를 마련했으면 좋겠다”며 “일본의 ‘사케’, 이탈리아의 ‘발사믹 식초’도 한 나라 안의 작은 지역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언론사에서 취재 오시면 꼭 ‘영암’이라는 지역을 넣어 강조한다. 왜냐면, 내가 만든 발효식품들이 내 고장 영암만의 하나의 새로운 브랜드가 되는 것을 바라고 또 나의 큰 꿈이기 때문이다”고 포부를 밝혔다.

‘속도’와 ‘편리함’에 민감한 현대인들에게 ‘기다림의 미학’을 삶 곳곳에 담은 조상들의 방식을 본받고 고수하라는 것은 무리겠지만, 그들의 전통과 지혜를 다시금 되새기고 체험의 장을 마련해 법고창신하는 김 대표와 같은 이들이 존재한다면, 지역의 브랜드를 넘어 세계화의 길에 나아가는 것은 꿈이 아닌 현실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