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진보사관’이라는 게 있습니다. 역사는 단선이든 나선형이든 발전해 나간다는 주장입니다. 계몽주의라는 것도 있습니다. 다른 인간을 이성적 존재가 되도록 깨우쳐 주자는 주의입니다. ‘자본주의론’이 있습니다. 여기서 자본주의는 근대화의 사회경제적 요건입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가 아니면 ‘전근대’ 또는 ‘봉건’이라고 합니다. 한 술 더 떠 반드시 자본주의를 거쳐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주장도 비록 소수지만 존재합니다.
운동권에서 가르쳤던(또는 가르치는) 진보사관, 계몽주의, 자본주의론, 이 셋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공통점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서양인의 주장이란 것이고 둘째 제국주의자들의 주장이라는 것입니다. 일단 두 가지만 말했습니다. 세 번째 공통점은 끝에 가서 밝히겠습니다.
‘타율성론’이라는 게 있습니다. 우리 역사는 자율적으로 발전할 힘이 없다는 주장입니다. ‘정체성론’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말 그대로 우리 역사는 정체되어 있었다는 주장입니다. 하나 더, ‘공리공론담’도 있습니다. 우리의 전통사상, 즉 주자학은 한낱 껍데기일 뿐(빌, 空)이라는 것입니다. 이 셋은 ‘식민사관’입니다. 아마 이것은 운동권 활동가, 운동권 지식인들도 동의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친일파와 식민사관을 배척합니다. 이를 청산하고 극복하기 위해 나름 노력도 해왔습니다. 그런데도 친일파는 청산되지 않았고 식민사관은 극복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제는 이런 문제를 소리 높여 주장만 할 게 아니라 진지하게 사색하고 연구하고 논의해야 할 시점입니다.
먼저 타율성론을 극복하기 위해 내 놓은 것이 ‘내재적 발전론’이지요. 조선 역사는 자율적으로 근대화할 수 있는 내재적 요인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이것은 ‘진보사관’을 비판 없이 수용한 부속 논의일 따름입니다.
다음으로 정체성론을 극복하기 위해 내놓은 것이 ‘자본주의 맹아론’입니다. 또한 이것은 ‘조선 봉건제론’과 한 축을 이룹니다. 여기에는 상업자본이 어떻고, 소작농 - 자영농이 어떻고, 화폐 유통이 어땠다는 등의 논의가 무질서하게 뒤따랐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자본주의 근대화론’을 비판 없이 수용한 부속 논의일 따름입니다.
우리는 공리공론담을 극복하기 위해 ‘실학’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일단 실학 논리는 전통적인 주자학이 공리공론이라는 주장에 굴복하고 들어가는 반전통적인 논리입니다. 또한 실학 논리는 ‘계몽주의론’을 비판 없이 수용한 부속 논의일 따름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진보사관과 자본주의론과 계몽주의는 서구의 제국주의 논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일정한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서구 백인들에게만 적용되는 논리였고 비서구 유색인들에게 무조건 따라오라고 강요한 논리였다는 점에서 기만적이기도 합니다.
딱 짚어서 하나의 예만 ‘진보사관’으로 들자면 18~20세기 300년 동안 인류 역사가 진보만 했습니까? 10개국 안팎의 소수 제국주의 국가는 진보했는지 모릅니다.(물론 진정한 진보와는 거리가 멀지만) 그러나 나머지 70여 개 식민지 국가들은 뭐란 말입니까?
진보사관, 계몽주의, 자본주의론, 이 세 가지는 모두 서양 제국주의자들의 논리입니다. 그리고 서양 제국주의는 식민사관의 아버지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셋 다 모두 ‘허구’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서양 제국주의적 허구의 논리로 식민사관을 극복하려는 헛발질만을 반복해 온 것입니다. 기왕의 ‘운동권 텍스트’는 폐기하고 새로이 써야 합니다. 남한 진보의 운동권 텍스트는 국가보안법만큼이나 ‘시공간착오적’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