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지식인의 ‘조선역사’는 99% 식민사관 - 원죄는 독일 역사학에 있다

[2019년 3월 8일 / 210호] ‘새 시대의 자주를 위하여’ - 19 영암우리신문l승인2019.03.08l수정2019.03.08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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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최근 몇 년 동안 종이책만을 너무 많이 읽었다는 생각에 요즘은 주로 영상물 독서에 치중하고 있다. 며칠 전 <도올 TV>에서 다산연구소 박석무 소장의 다산 강의를 시청했다. 박 소장은 다짜고짜 조선 국왕 영조를 힐난했다.
그는 말하기를, 영조가 권력욕으로 사도세자에게 양위하지 않고 52년 간이나 왕 노릇을 했다고 하더니, 급기야 노론 벽파와 공모하여 사도세자를 죽였다고 사실과 전혀 다른 악담을 퍼부었다. 또한 그는 괴테와 헤겔을 세계 최고의 문학가, 세계 최고의 역사가라고 추켜세우는 발언도 했다.
한 마디로 해서 ‘충격’이었다. 그는 전형적으로 식민사관에 의한 조선역사를 의기양양하게 피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산연구소 소장이라고 해서 조금 다를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는 더 심한 편이었다. 2012년에 한 강의니까 그리 오래 된 것도 아니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이렇게 '뭣도 모르는' 분들이 식민사관이나 유럽중심사관 강의를 멈추지 않고 있다는 데에 있다.
사실 박 소장뿐 아니라 50대 이상 한국 지식인의 99%는 일본인이 만든 식민사관에 의하여 조선역사를 알고 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일단 조선역사가 1차사료에 근거하여 제대로 연구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 이후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계의 연구가 대중화되기까지에는 수십 년이 걸린다.
한국 지식인의 99%가 알고 있는 조선 역사는 모두 직간접으로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전사> 35권에 근거한다. 일본인들은 무려 21년 간이나 노력을 기울여 식민사관으로 도배된 조선역사를 출간했다. 그렇다면 식민사관적 조선역사란 어떤 것일까?
일본인 쓰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 교수는 1979년 76세 나이로 위장 수술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그는 자서전을 쓰게 된다. 이 자서전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이 자서전은 희한하게도 연표로 구성되어 있다.
1904년, 메이지(明治) 37, 1세 8월 10일 출생
1911년, 메이지 44, 8세 4월, 나라소학교 입학
1917년, 다이쇼(大正), 14세 다가와중학교 입학
이런 식이다. 말년에는 “1979년 오나미 위장외과병원 입원, 니시쿠보병원으로 이송, 수술, 퇴원” 등이 적혀 있고 그 아래에 “갱생 1”이라고 기록해 놓았다. 여기에는 어떤 개인적인 감정이나 주관적 판단이 개입되어 있지 않다.
이 자서전은 조선사편수회가 간행한 ‘조선전사’와 거의 동일한 구조이다. 자신의 삶을 연대기의 틀 속에 밀어 넣고 지나온 길을 반추하는 이 기묘한 ‘역사스러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언젠가 나와 조선 봉건제 논쟁을 한 독일철학 전공 이봉건 교수는 나에게 “조선역사라는 게 전부 연도별 기록 아닙니까?”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아마도 그는 일본인이 쓴 ‘조선전사’를 보았거나 귀동냥해 들은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이봉건 교수의 말에서 쓰메야쓰를 떠올렸다.
그렇다면 쓰에마쓰는 누구인가? 그는 식민주의 역사학의 핵심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한국의 역사학자 최재석은 1986년 ‘한국학보’ 12권 - 2호에서, “쓰메야쓰는 쓰다 소키치 이래 일단의 일본인 학자 중에서 가장 치밀하게 그러나 가장 억지와 허위에 의해서 한국 고대사를 왜곡 말살하려는 사람이었다.”라고 평가했다.
쓰메야쓰는 조선사편수회와 경성제국대학에서 각각 수사관과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일본이 패전하고 나서 한참이 지난 1969년에도 조선사편수회 사업을 회고하면서 여전히 자기들의 조선사 편찬을 정당화했다.
“식민지에서 그 나라의 역사를 지배자, 통치자가 적는 것에는 모순이 있습니다. 출발은 정치적 방편이었습니다만 나중에는 그렇지 않은 방향으로 발전해 갔습니다. 총독부의 관리가 조선을 통치하는 것과, 역사가가 조선의 역사를 편찬하는 것에는 커다란 입장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총독부의 녹봉을 받았던 역사가는 어용학자로 불립니다만 이것이 모두 옳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쓰메야쓰는 조선사편수회의 사업이 총독부의 정치적 목적 하에 진행된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조선사 편찬이 학자적 양심에 따라 이루어진 것처럼 변명했다.
한국인 역사가 김효순에 의하면, 패전 후 일본의 한 식민지 관료는 조선인 연구가들을 모아 놓고, “너희들이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데, 식민지라는 것은 영국의 인도 지배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한 적이 없다. 조선을 일본의 일부로 하고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한 것뿐이다”라고 꾸짖었다고 한다.
놀랍게도 일본은 패전 후에도 조선사 연구를 재출발시켰다. 이를 주도한 하타나 다카시는 “전전(戰前)의 일본인에 의한 연구 축적은 커다란 것이었다. 장래의 연구 역시 이를 무시해서는 진전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타나가 장담하는 것은 일본인의 조선사 연구가 ‘실증과 고증이라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연구 방식을 중시하는 유럽의 근대 역사학’이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우리는 유럽의 근대 역사학이 식민사학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는 점을 뼈아프게 인식해야만 한다. 조선사편수회는 ‘실증과 고증’이라는 방법론을 ‘선진화된 유럽의 방식’이라고 은연 중 주입하면서 너무도 정교하고 교묘하게 조선을 비하할 수 있는 자료들 위주로 모아 ‘조선전사’라는 연표를 만들었던 것이다.
사학자 심희찬 교수는, “패전 후 일본의 조선사 연구 그리고 해방 이후 한국의 한국사 연구는 식민주의 역사학을 근대 역사학의 사생아로 만드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정통성을 구축해 왔다”고 말한다. 그는 “식민주의 역사학이 커다란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이는 근대 역사학 그 자체의 문제와 관련지어 바라보아야 할 것은 아닌가?”라고 문제를 제기한다.
근대 역사학이란 유럽의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독일이 원조이다. 여기에 한국의 모양주의 진보 지식인들이 속수무책으로 넘어가 버렸다. 내가 왜 “일단 유럽을 버려라”라고 말하는지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일본인들의 조선사 왜곡은 너무도 정교하고 교묘해서 낱낱이 밝히기가 힘들 지경이고 사람들을 이해시키기가 힘에 부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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