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한국인 아나운서에게 들은 얘기인데, 일본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상 서랍 비밀번호는 1789라고 한다. 나는 그가 왜 프랑스혁명의 연대를 자기의 비밀번호로 취하게 되었는지 그 내막까지는 알지 못한다. 또한 이런 비밀번호 설정이 대단히 기발하고 세련된 것인 양 전하는 한국인 아나운서의 태도도 이해하지 못한다.

예전에 ‘파리의 택시 운전사’라는 책을 낸 진보인사가 있었다. 그는 곧잘 ‘똘레랑스’나 ‘노블리스 오블리제’ 같은 말을 주워섬겼다. 나는 그의 책을 읽지 않았지만 만에 하나 그가 파리의 택시 운전사가 서울의 택시 운전사 또는 광주의 택시 운전사보다 멋지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것은 이상한 일이다.

몇 년 전 나는 제주도에 가서 강의하다가 창밖에 있는 간판을 보고 혀를 찼던 적이 있다. ‘에펠탑 어린이 음악학원’이 거기 있었다. 대관절 이역만리 프랑스에 있는 그 흉물스러운 철탑이 한국의 아름다운 섬 제주의 어린이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지?

웃지 못할 촌극은 얼마든지 더 있다. 얼마 전 파리에서 테러가 발생했을 때 프랑스 삼색기로 자신의 페북 프로필을 장식한 사람들이라든지, 프랑스 요리나 프랑스 패션에 대한 대책 없는 선망 등이 그것이다. 또한 최근 들어 한국 아파트들의 이름에 대거 등장한 뜻도 모를 정도로 난해한(?) 프랑스 말들...

나는 한국인이 왜 유독 프랑스를 동경하거나 프랑스에 관대한지 납득할 수가 없다. 굳이 ‘병인양요’나 ‘제국주의’를 말하지 않더라도 프랑스가 한국인에게 좋은 인상을 줄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유럽 국가 중 가장 반북적인 나라로서 이북과의 수교를 거부하고 있다.

아직도 1789년의 프랑스혁명이 세계사적 보편성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서양학자도 문제지만 만약 한국인 학자가 그런 말을 한다면 그것은 이미 ‘코미디’ 수준이라는 것이 내 관점이다. 영국혁명, 미국혁명이 그런 것처럼 프랑스혁명 역시 여성과 유색인과 소외계층을 철저히 외면했다.

이화여대 강철수 교수는, 한국인이 프랑스혁명의 보편성을 자유, 평등, 우애(박애)와 관련해 생각하는데 여기에는 큰 오해가 존재한다고 했는데 너무도 지당한 말이다. 강 교수는 프랑스 혁명기에 가난한 사람에 대한 배려는 별로 없었으며 또 이런 법적 평등은 선거에서의 재산자격 조항에 의해 크게 제약되었고 자유와 평등의 결합은 19세기까지도 재산 있는 소수의 특권으로 머물렀다고 말한다.
“프랑스는 영국 다음으로 식민지를 많이 갖고 있던 식민국가이다. 그런데도 식민주의적 악행은 쏙 빼놓고 프랑스혁명만 내세워(그것도 문제가 많지만) 보편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균형 잡힌 사고라고 하기는 어렵다.”(강철구)

맑스주의자들은 프랑스혁명이 부르주아혁명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역사를 왜곡한 것이다. 프랑스혁명은 정확히 말해서 귀족과 부르주아가 이권을 놓고 벌인 정치투쟁이었으며 여기에 인민이 이용된 것이다. 프랑스혁명으로 만들어진 공민회의는 다분히 기만적이었다. 회의에 인민 대표의 참여는 없었으며 부르주아의 참여 비율도 30%를 넘지 않았다. 공민회의는 ‘특권계급의 회의’에 불과했다.

무엇보다도 프랑스혁명의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따져 보면 알 수 있다. 혁명을 왜 하는 것인가? 평화와 평등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하는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이후 100년 동안 프랑스는 평화와 평등과는 거리가 먼 혼돈과 약탈의 양상만을 노출했다.

혁명정부는 공포정치를 실시하면서 불과 1년이 안 되는 사이 1만 7,000명을 단두대에서 처형했다. 이어서 프랑스는 나폴레옹의 제국주의로 치달아 유럽 전체를 전국시대(戰國時代)로 후퇴시켰다. 이 과정에서 200만 명이 넘는 인민이 희생되었다. 사실 나폴레옹의 제국주의적 침공은 20세기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침공보다 인류 역사에 부정적인 후과를 남겼다.

단언하건대 프랑스혁명은 우리의 동학, 광주, 4.19만도 못한 ‘변란’이었다. 이런 변란을 위대한 세계사적, 보편사적 혁명으로 둔갑시킨 것이 맑스주의적 해석이었다. 프랑스의 문화적 민족주의와 유럽 중심주의적 맑시즘이 기묘하게 결합되어 시너지 효과를 빚어낸 것이다.

‘프랑스혁명’이 갑자기 뜨기 시작한 것은 향후 100년이 되는 시점에서였다. 이때는 유럽인들이 자기의 역사를 세계사적 보편사로 만드는 역사왜곡을 본격적으로 감행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프랑스의 ‘근대인’들은 ‘혁명 100주년’을 엄청 부각시켰다. 그들은 1889년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만국박람회라는 것을 열었다. 이때 세워진 것이 에펠탑으로서 그것은 제국주의 약탈에 힘입은 바가 큰 프랑스의 산업화를 상징하는 철탑이었다. 무엇보다도 혁명 100주년을 기념한 그 만국박람회에 ‘인종전시관’이 따로 있어서 유색인들을 잡아다가(?) 동물원의 우리처럼 만들어 전시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혁명 좋아하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