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건강장수의 비결은 무엇일까 - 조선은 임진왜란 때 망했어야 한다?

[2019년 1월 11일 / 203회] ‘새 시대의 자주를 위하여’ - 14 영암우리신문l승인2019.01.11l수정2019.01.11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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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조선왕조는 518년 동안 존속한 당대 세계 최장수 왕조였다. 우리보다 역사가 길고 왕조가 더 많았던 중국의 경우 최장수한 왕조의 수명이 300년을 넘지 못했다. 그런데 식민사관에서는 조선왕조의 수명이 길었다는 것까지 부정적으로 말한다.

도올 김용옥이 “조선왕조는 임진왜란 때 망했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의아했던 적이 있다. 물론 도올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이 보인 무능과 보신주의를 비판하려고 하다 보니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또한 그는 당시 우리 민족이 당했던 수모에 분기가 탱천해서 그런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말은 동기의 순수성에 비해 비과학적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다.

일단 우리는 무엇이든 수명이 남달리 길었으면 거기에는 무언가 비결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국가건 사람이건 남달리 오래 산다는 것은 건강하지 않고서는 안 되는 일이다. 예컨대 100세까지 장수한 아버지가 죽었을 때, “우리 아버지는 너무 오래 사셨어. 환갑 지나서 당뇨가 왔을 때, 또는 80세 넘어 이가 다 빠졌을 때 돌아가셨어야 했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조선왕조 건강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를 댈 수 있지만, 조선이 임진, 병자 양란을 거치고서도 동아시아 선진국으로서의 체모를 오래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 중의 하나로 나는 성종대에 결성된 청요직 연대를 든다. 청요직 연대는 16세기 이후 군신공치의 새장을 열어 조선의 정치에 합리성을 투여했을 뿐 아니라, 위정자 집단을 끊임없이 도덕적으로 긴장시켰기 때문이다.

조선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9대 성종(1469 ~ 1494), 10대 연산군(1494 ~ 1506)과 11대 중종(1506 ~ 1544)까지의 75년 시기는 대단히 중요하다. 이 기간에 세 번의 사화가 일어났고 첫 번째 반정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사화와 반정의 시대’저자 김범은, “조선시대를 임진왜란을 중심으로 전·후기로 나눌 경우 경국대전이 완성되고 진통 끝에 국왕 - 대신 - 삼사의 정립구도가 자리 잡은 건국 100여 년 뒤 3대 75년 간의 치세가 조선후기까지 관통하는 제도의 토대를 놓은 시기다”라고 말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인 김범은 조선시대의 사화(士禍)에 대해 대단히 합리적인 견해를 피력한다. 우리는 흔히 사화라고 하면 치정이 얽힌 궁중 암투극이거나 훈구 - 사림 간의 대립으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일단 이런 관점은 고루하고 상투적이다. 그리고 이런 관점은 사람들이 동의하건 말건 식민지시대 조선사편수회의 것이며, 요즘의 흥행영화나 텔레비전 사극 등과도 비슷한 것이다.

식민사관 중에 당파성론이라는 게 있다. 조선은 허구 한 날 당파싸움만 벌이다가 망했다는 것이다. 일단 당파싸움이라는 호칭부터가 식민사관의 용어이며 붕당이 정상적인 호칭이다. 일본의 식민사학자들은 조선의 사화와 반정을 당파싸움의 소산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화와 반정을 당파싸움과 무관하게 보는 관점은 최근 들어 식민사관에 영향 받지 않은 신진학자들 사이에서 점차 공유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조선왕조의 군신공치 체제는 당대 세계적으로 보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진보적인 정치체제였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탄압 받지 않은 진보는 없었다. 조선시대 사헌부와 사간원과 홍문관을 합쳐 삼사라 한다. 삼사는 기득권 권력인 왕권과 대신 권력을 철저히 비판, 견제하면서 공론을 생산하는 역할을 다했다.

이 삼사의 구성원을 중심으로 하는 일군의 관료들에게는 ‘청요직[淸要職, 청환(淸宦)과 요직(要職)]’이라는 명예로운 호칭이 부여되었다. 당대의 청요직들에게는 분명히 단순한 관료의 범위를 넘어서는 성격이 있었다. 그들은 국가의 관료라기보다 나라 전체의 도덕성과 진보주의를 견인하는 교사(敎師)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청요직들은 작은 일 하나도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었고, 도덕적 명분 앞에서는 연령이나 위계질서도 거의 중시하지 않았다. 그들이 시종일관 추구한 것은 고원한 사(士)의 이상을 현실정치에 적용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는 어김없이 반발과 탄압이 수반되는 것 또한 역사의 이치에 속한다.

‘경국대전’의 완성(1485년)은 성종대의 가장 중요한 업적이었다. 이로써 삼사를 비롯한 주요 관서들의 기능은 국법에 보장된 불가침의 영역으로 편입되었으며 청요직들의 역할은 헌법적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국왕이 조정력을 행사하면서 대신과 삼사가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체제가 형성된 것은 조선 정치의 중대한 변화이고 진전이었다.

이처럼 국왕 - 대신 - 청요직으로 이루어진 특유의 ‘3권정립’이 있었기에 조선은 임진, 병자의 위기를 극복하면서 세계 최장의 국가 수명을 누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조선은 제국주의의 침공으로 패망했다. 굳이 패망의 내재적 요인을 찾는다면 삼권정립이 무너지고 세도정치의 일당독재가 이루어져 외세의 침공에 선제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점을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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