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나는 동양 민족의 위대함을 충분히 인정합니다만, 이 위대한 여러 민족에게는 그 절대적인 정부가 서양에 있는 우리의 손에 있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습니까?"(1910년 제임스 밸푸어, 영국 하원 연설)
나) "그들이 고대의 문명을 그대로 보존하지 못하고 전래의 생활수단을 동시에 상실하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영국은 인도에서 이중의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하나는 파괴의 사명이고 또 하나는 재생의 사명이다. 낡은 아시아 사회를 파멸시키는 것 그리고 서양 사회의 물질적 기초를 심는 것이다."(칼 마르크스, Surveys from Exile ed David Fernbach : London Pelican Books, 1973, pp 306~307)

가)는 영국의 대표적인 제국주의 정치가 밸푸어의 것이고 나)는 우리가 잘 아는 마르크스의 것이다. 가)와 나)는 공히 영국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비호하고 있다. 가)의 대상은 이집트, 나)의 대상은 인도다.
제국주의자 밸푸어는 이집트는 위대하다고 해 놓고, 그러나 영국이 그들을 지배해야 한다고 했으며, 인류 평등을 주장한 마르크스는 인도는 불쌍하다고 해 놓고, 그러나 영국은 인도를 지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두 발언의 우열을 따질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 이 둘에 나타나 있는 공통점은 ‘위선’일 따름이다.
이처럼 서양 지식인들의 제국주의적 사고에는 거의 예외가 없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역저 <오리엔탈리즘>에서 50명에 달하는 세계적인 서양 정치가, 학자, 문학가가 유럽우월주의에 예외 없이 관련되어 있음을 실증해 놓은 바가 있다.
서양우월주의는 서양인이 동양을 지배하고 억압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다. 18,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동양을 침공한 서양은 자기들의 우월성을 과장하면서 동양을 열등한 타자(他者)로 정의했다. 그리하여 서양이 진보적, 합리적이라면 동양은 후진적, 비합리적인 곳으로 만들었다. 동양이 ‘나약한 여성과 아동’이라면 서양은 그들을 후원하는 ‘강한 남성이자 성인’으로 조작되었다.
유럽인이 만들어낸 동양의 이미지는 정체적이고 획일적이며 자기 스스로를 대변할 능력이 없다. 이것은 유럽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지적, 문화적 우월감을 가지게 했으며 제국주의적 자만심의 근거가 되기에 충분했다.
유럽인은 동양인을 불완전한 인간으로 본다. 서양을 기준으로, 서양의 것을 보편으로 간주한다. 요즘도 동양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각종 미디어와 영상매체 그리고 학술서적 등에서 여전히 반복적으로 재현되고 당연시된다.
하지만 무서운 것은 서양우월주의가 제국주의보다 후발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서양우월주의는 식민 지배를 위해 선제적으로 준비된 것이다. 유럽의 계몽주의 학자들은 동양인의 열등함과 미개함을 구원하기 위해 동양을 문명화해야 한다는 제국주의적 사명감을 서유럽의 정치가와 군인들에게 제공했다.
‘유럽 근대의 계몽주의는 서유럽 제국주의의 맹아’ 역할을 담당했다. 우리에게 더욱 무서운 것은 서양인이 만든 ‘서양인 대 동양인’의 구도를 일본의 식민사학자들이 ‘일본인 대 조선인’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점이다.
한국의 오리엔탈리즘 전문가 이옥순 교수는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에서 오리엔탈리즘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박제(剝製) 오리엔탈리즘’이고 또 하나는 ‘복제(複製) 오리엔탈리즘’이다.
영국은 인도를 식민지로 지배하기 위해 인도와 인도인들을 식민화에 유용한 열등한 이미지로 조작했다. 결과 인도는 점차 영국의 열등하고 부정적인 타자로 굳어져 갔다. 이것은 실재하지도 않은 것인데 본질적인 것으로 박제된 오리엔탈리즘이다.
반면 복제 오리엔탈리즘은 이러한 박제 오리엔탈리즘에 감염된 한국인의 의식이다. 나는 이를 가리켜 ‘모양주의’라고 이름 붙였다. 모양주의자들은 서구의 기준으로 우리 역사를 본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마르크스가 말한 영국의 역사발전론에 대입시키기 위해 조선을 봉건제라고 왜곡, 비하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다. 요컨대 ‘박제’는 서양 제국주의자들이고 ‘복제’는 한국의 서구 추종 모양주의자들이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 출간된 것은 1978년으로 벌써 40년이나 되었다. 이 책은 30개 국어 이상 번역되면서 이미 세계적인 고전 반열에 올라섰다. ‘조작된 서양우월주의’는 더 이상 논쟁거리도 아닌 역사의 정설이 되었다. 그럼에도 유독 한국의 진보 지식인들만 서양우월주의를 모르고 있거나 애써 외면하고 있다. 이것은 나태하거나 비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