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서울에는 독서당길이라는 이름의 도로가 있다. 성동구 응봉로에서 금옥초등학교를 거쳐 용산구 한남동에 이르는 4차선 도로이다. 길 이름이 재미있고 호기심을 발동케 한다. 독서당은 조선시대 과거에 급제한 젊은 문신들을 위한 연구시설로 세종 8년(1426)에 처음 세워진 건물이다.
1517년(중종 12)에는 지금의 서울 성동구 옥수동 한강 연안의 두뭇개(豆毛浦)에 또 하나의 독서당을 신축하고 ‘동호(東湖)독서당’이라 하였다. 그래서 옥수동에서 약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독서당고개라고 불렀다.
조선조에는 ‘사가독서(賜暇讀書)’라는 것이 있었다. 왕이 젊은 신하들에게 유급휴가를 주어 책을 읽도록 한 제도이다.『조선왕조실록』에는 연산군 때 영의정 한치형 등이 학문을 경시하는 왕에게 사가독서를 언급한 대목이 있다.
“세종께서는 나이 젊고 명망이 있는 유신들을 선발하여 산방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게 하였고, 성종 때에도 독서당을 한강 가에 설치하고 번(番)을 나누어 글을 읽게 하였으니, 그 예비하여 양성하는 방법이 지극하였습니다.
근년에는 흉년으로 인하여 폐지하고 거행하지 않으니 실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청컨대 다시 인원을 정밀하게 선발하여 부지런히 학문을 닦게 하되 질병이나 대고(大故) 이외에는 사고를 핑계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좇았다.(연산군일기, 1500년. 9.26)
한치형 등은 학문, 즉 공부는 질병이나 대고(큰 사고)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해야 하는 것이라면서 왕을 압박했고, 이에 연산군도 어쩔 수 없었는지 ‘그대로 좆았다’는 것이 재미있다.
나는 조선처럼 학문과 독서를 중시한 나라가 또 있었는지 잘 알지 못한다. 다음을 읽어 보자. 이번에는 앞의 것과 반대가 되는 상황이다.
- 정언 채소권이 아뢰기를, “사가독서(賜暇讀書)는 매우 아름다운 취지이나 금년은 흉황이 너무 심하니, 긴요하지 않은 비용은 일체 줄이고 정파(停罷)하소서.” 하였으나, 또한 윤허하지 않았다.(중종실록 15111년 10월 3일)
흉년이 들어 비용을 줄이기 위해 사가독서를 잠시 연기하자는 주장에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는 것이 또 재미있지 않은가? 사가독서는 왜구가 침범한 국가비상사태에서도 이어졌다. 중종은 “사가독서하는 것이 적변(賊變)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니 속히 회복하게 하라.”는 전교를 내리기도 했다. 공부는 국가변란 때에도 멈출 수 없다는 논리였다.
조선시대는 유달리 독서광이 많았다. 그 중 하나인 이덕무의 글이 아주 재미있다.
“색(色)을 좋아하는 사람은 골수가 마르고 살이 빠진다. 그러다가 죽게 되는 날 밤에도 욕망의 불꽃이 위로 치솟아 오르지만 끝내 뉘우치는 마음이 없다. 그가 이룬 것이라곤 하나의 색에 빠진 아귀(餓鬼)일 뿐이다.
나는 그런 인간을 일찍이 비웃고 가여워하고 두려워하고 경계하였다. 허나 내 자신이 불행히도 그런 인간에 가까운 점이 있는 줄을 까맣게 몰랐다. 내가 책을 좋아하는 것이 색을 좋아하는 것과 너무도 비슷하다. 요사이 유행하는 풍열(風熱)로 인해 오른쪽 눈마저 가렵다. 남들은 몹시 걱정하며 모두들 책을 읽어 생긴 병이라고 하였다. 나도 그렇다고 인정하기는 한다.
그러나 책은 차마 하루도 떠나질 못한다. 한 오라기의 실눈이라도 뜰 수 있다면 글자와 먹 사이의 정화(精華)에 집중하여 맥망이 ‘신선’이란 글자를 파먹는 방법을 쓴다. 그러니 저 색에 빠져 죽은 자들이 내게 야유를 퍼부을 게 분명하다.” (이덕무, 이목구심서, 耳目口心書)
만약 ‘색(色)보다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거짓말쟁이거나 뭔가 장애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덕무는 참 솔직하다. 그는 자기가 색만큼 책을 좋아하는데 그래도 책을 더 많이 선택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했다. 그렇다. 색과 책을 함께 좋아하면서 책을 더 선택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점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 그가 바로 진정한 독서광이다.

※ 지난 2년 동안 연재해 온 ‘조선역사에세이’를 종료합니다. 읽어주신 분들에게 고마움을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