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우리는 흔히 조선은 왕이 국정을 좌지우지한 나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조선의 왕권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강하지 않았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이 고도로 발달된 관료체계를 갖춘 나라라는 점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15세기에는 국왕의 명을 충실히 따르는 관료 지향성이 강했지만, 16세기 들어 과거의 확대로 인해 이른바 사(士)의 성격을 갖춘 지식인층이 두텁게 형성되었다. 이들 지식인들은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면서 하급 엘리트 관료층을 새로이 구축했다. 그들은 철저하게 도학에 기초한 도덕적 정당성을 자기들의 의지 관철과 이상 실현의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내가 학교 다닐 때에 배운 역사에는 ‘청요직’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청요직은 조선 역사 연구에서 새로이 부각된 용어이다. 모 대학교 도서관 사이트에 들어가 검색을 해보니 청요직이라는 말을 제목으로 삼은 논문은 국내 두 편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청요직이 조선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막중했다. 성종대 이래로 청요직은 국왕, 정승(의정부, 6조)과 함께 조선의 국정을 움직인 3대 축의 하나였다. 나는 이를 가리켜 ‘조선식 삼권분립’이라고 말한 바가 있다.
청요직은 청직(淸職)과 요직(要職)을 합한 말인데, 글자 그대로 깨끗하고 중요한 직책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삼사, 즉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알고 있다. 청요직은 이 삼사의 관리가 주축을 이루고 여기에 이조정랑과 병조좌랑, 그리고 예문관 한림 등이 포함된다.
청요직들은 성리학이라는 조선 사회의 지향성을 누구보다도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하는 삶을 실천했다. 이런 공통된 가치 지향은 자연히 그들의 연대를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이른바 ‘청요직 연대’라고 할 수 있었다.
청요직 연대는 날이 갈수록 강화되었다. 감찰과 언론은 그 기능만으로도 막강한 힘을 갖는 법인데 그들에게는 실력과 명분까지 있었으니 대신들은 물론 왕도 그들의 주장에 함부로 반대할 수가 없게 되었다.
사헌부나 사간원에서 국정 현안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면 국왕이 이에 대한 수락 여부를 독자적으로 결정하거나 대신들과의 협의를 통해 결정을 내렸다. 만약 이 과정에서 사헌부나 사간원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들은 수차례에 걸쳐 같은 요구를 반복했다. 그래도 수용되지 않으면 사헌부와 사간원 양사가 합사하여 압박을 강화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경연 시간 등을 이용하여 끊임없이 자기들의 주장을 개진하기도 했다. 그들은 주장을 내세울 때 대부분의 경우 경전에서 근거를 찾아서 들이댔다. 물론 왕은 양사가 합사하여 압박해 들어온다고 해도 그것을 거부할 권한이 있었다.
특히 왕실 문제와 같은 민감한 사안의 경우 주장을 너무 강하게 하다가 국왕의 심기를 거슬러 사헌부나 사간원의 대간이 전원 교체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새로 임명된 청요직들 역시 인격과 가치관 면에서 전직들과 비슷했기 때문에 전직들의 주장을 되풀이하기가 일쑤였다.
이때 만약 사헌부나 사간원의 대간들이 왕의 위세에 눌려 주장을 약하게 하면 최종적으로 나서는 것이 홍문관이었다. 이럴 경우 홍문관은 먼저 언관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면서 대간들을 논박했다.
홍문관의 논박을 받은 대간은 일단 피혐을 통해 사직해야 했다. 이처럼 홍문관은 사헌부와 사간원을 두둔하면서도 때에 따라 그들을 견제, 지도하는 기능까지 행사했던 것이다.
사헌부와 사간원이 양사 합사로 왕을 압박했을 때 거부되는 사안이 종종 있었지만, 양사에 홍문관이 가세하여 삼사 합사로 압박할 경우 이를 왕이 거부한 일은 거의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막강한 청요직 중에서도 최고 권위자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감찰기관인 사헌부도 아니고 언론기관인 사간원도 아니었다. 학문기관인 홍문관의 권위가 으뜸이었다. 이것은 조선이 왜 문치국가인지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